홍콩 재벌이 위기에 빠졌다. 집값폭등, 빈부격차 확대 등으로 재벌에 대한 국민의 시선이 싸늘해진데다 부정부패 척결 차원에서 재벌 비리를 단죄하려는 홍콩 당국의 수사 의지도 점점 확고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부의 상속문제도 현안으로 대두돼 있다.
부동산재벌, 잇단 법의 심판대에
홍콩 반부패 전담 조사기관인 염정공서(廉政公署ㆍICAC)는 7월 홍콩 부동산재벌 순훙카이(新鴻基)그룹의 토머스 ?(郭炳江ㆍ59)과 레이먼드 ?(郭炳聯ㆍ58) 회장 형제를 전격 기소했다. 두 형제 뿐 아니라 라파엘 후이(許仕仁ㆍ64) 전 정무사장(총리격) 등 3명도 뇌물방지조례 위반 혐의 등으로 함께 기소했다. 재판은 다음달 12일 시작된다. 이 사건은 ICAC가 발족 이후 처음으로 최고위급 관료와 재벌의 유착관계를 들춰낸 것이라는 점에서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외신에 따르면 후이 전 정무사장은 순훙카이로부터 9년간(2000~2009년) 3,400만홍콩달러(49억6,600만원)상당의 뇌물을 받았다. 무담보로 거액을 대출받고, 호화주택 두 채도 제공받았다. 하지만 이를 대가로 순훙카이가 어떤 혜택을 누렸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주식은 홍콩증시에서 거래가 중단됐다. 순훙카이는 국제금융센터 등 홍콩의 대표적인 고층빌딩 수백 채를 운영하는 대표적인 부동산 그룹이다. 회장 형제의 재산은 183억달러(20조7,70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도널드 창(曾蔭權ㆍ68) 전 행정장관도 다른 재벌로부터 호화요트와 전용기로 여행 접대를 받은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어 권력형 비리에 연루된 재벌은 더 늘어날 전망이다.
집값폭등과 빈부격차의 주범
재벌에 대한 여론은 곤두박질쳤다. 부의 과도한 편중과 집값폭등에 따른 비난의 화살이 재벌에 쏟아졌다. 홍콩 재벌(10억달러 이상 보유)의 재산을 모두 합치면 홍콩 국내총생산(GDP)의 70%에 달한다. 부동산 시장도 상위 3개 회사가 주택시장의 65%를 장악하고 있다. 슈퍼마켓 등 유통소매업의 90%는 대기업 소유다. 홍콩에서 1달러를 쓰면 이중 23센트는 재벌에 들어간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대중교통에서부터 통신, 비행기와 호텔 등 모든 산업이 일부 기업에 쏠려있다. 홍콩의 빈부격차 수준은 세계에서 가장 높다. 반 재벌 활동가 퐁야밍(38)은 "대중교통인 버스도 재벌이 운영해 자전거로 출퇴근 한다"며 "재벌이 모든 것을 가지고 서민의 삶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말했다.
재벌의 부동산 투자로 집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2008년 이후 홍콩 집값은 82%가 뛰었다. 2009년 금융위기 이후 중국 본토와 재벌들이 금융당국의 초저금리 정책을 이용해 부동산에 앞다퉈 투자한 때문이다. 반면 서민들의 임금 수준은 10년 동안 그대로였다. 한 노동자는 "어렸을 적 리카싱 청쿵그룹 회장을 슈퍼맨이라고 부를 정도로 존경했지만, 이제는 아니다"고 분노했다.
재벌 2세의 상속 투쟁
1930~40년대 자수성가로 부를 쌓아온 홍콩 재벌 1세대의 퇴장도 재벌 위기의 한 원인이다. 상속 과정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대표 인물이 교체되면서 기업이 위기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부동산 금융 통신 등 30여개 사업체를 거느린 청쿵(長江)그룹의 리카싱(李嘉誠ㆍ84) 명예회장을 비롯해 카지노재벌인 스탠리 호(何鴻桑ㆍ90), 보석업계의 큰손 저우다푸(周大福)의 정위퉁(郑裕彤ㆍ87) 명예회장, 부동산개발업체 핸더슨랜드의 리샤우키(李兆基ㆍ84) 등은 상속절차를 진행 중이다. 섬유재벌 난펑(南風)그룹은 천팅화(陳廷驊) 회장 사후 두 딸이 치열한 재산다툼을 벌이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홍콩 싱가포르 대만 등의 250개 가족 중심주의 기업들이 상속 과정에서 주가가 평균 60%가량 하락했다고 밝혔다.
재벌에 등돌리는 정부
홍콩 정부도 재벌에 등을 돌리고 있다. 렁충잉(梁振英•58) 신임 행정장관은 7월 취임식에서 "나는 어떤 기업과도 사적인 관계 등 친분을 유지할 필요가 없다"며 "700만명의 홍콩인을 위해 일할 것"이라고 재벌과 거리를 뒀다.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도 렁 장관에게 "홍콩의 사회불만이 향후 5년간의 성장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이 문제부터 해소하라고 지시했다. 렁 장관은 이에 부응하듯 850억홍콩달러를 투입해 대규모 주택공급 정책을 내놨다. 지난해 홍콩 내 신규주택 수가 9,500채였는데, 올해 새로 짓는 주택은 지난해보다 두 배가 넘을 것으로 예상됐다.
재벌의 부동산 투기를 막기 위한 부동산 거래세도 강화했다. 부동산 취득 후 2년 이내에 되팔 경우 높은 세금을 물리는 것이다.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청쿵그룹은 올 상반기 중 토지매입이 한 건에 그쳤다. 이로 인해 거래가 줄면서 매출은 지난해 대비 절반으로 떨어졌다.
신야밍 홍콩 중문대 교수는 "재벌이 독점하던 시장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서는 정부가 재벌 중심의 경제구조를 개선해야 한다"고 밝혔다.
강지원기자 styl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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