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의 지하철 3호선 신사역. 이 곳 8번 출구에서 나와 100m 정도 걸으면 '가로수길' 입구가 시야에 들어온다. 신사역에서 압구정역까지 이어지는 길이 680m의 2차선 도로는 2000년대 초반부터 양 옆으로 디자이너 숍과 카페, 음식점들이 속속 생겨나면서 압구정동을 대체하는 젊음의 거리가 됐다.
현재 가로수길은 대형 의류브랜드, 유명 음식점, 커피전문점이 점령하다시피 했다. 초입부터 CJ의 음식매장들이 건물을 통째로 차지하고 있고, 제조·유통일괄형 의류(SPA)브랜드인 제일모직의 에잇세컨즈, 자라, 포에버21 등이 눈에 띈다. 2004년부터 가로수길을 지켜온 커피매장 블룸앤구떼 자리엔 의류 브랜드 라코스테 매장이 최근 들어섰고, 스타벅스, 스무디킹 등 대기업 음료매장들이 서로 어깨를 대고 있다. 또 여기 저기에서 다른 대기업매장들의 입주 공사가 한창이다.
가로수길 인근 사무실에 근무하는 회사원 이선우(27)씨는 "가로수길은 이제 다른 곳에서도 살 수 있는 SPA브랜드와 화장품 브랜드가 많아져 과거와 같은 특유의 느낌이 사라졌다"며 "그래서 회사 동료나 친구들과 가로수길에서 안쪽 골목으로 더 들어가 작은 가게들이 모여 있는 세로수길을 누비며 조용하고 특색 있는 매장을 찾아 다닌다"고 말했다.
가로수길(강남구 신사동)뿐만이 아니다, 이태원(용산구 이태원동)이나 홍대앞(마포구 서교동) 등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서울의 주요 거리 상권이 크게 확장하고 변모하면서 옆 동네까지 새로 뜨고 있다. 기존 상권들이 대중화ㆍ상업화 하면서 거리 고유의 색깔이 흐릿해지자, 한적하고 특색 있는 공간을 찾아 나선 이들을 겨냥한 작은 가게들이 이웃 동네에서 우후죽순처럼 번지고 있는 것. 이른바 이들 '대안 동네'로 뜨는 곳들은 기존 상권보다 임대료나 땅값이 저렴해 개인들이 매장을 내기가 상대적으로 수월하다는 공통점들이 있다. 대표적인 곳이 세로수길, 경리단길, 연남동 등이다.
세로수길은 가로수길 양 옆으로 뻗어있는 골목들이다. 한자의 가늘 세(細)를 따서 붙였다고 한다. 이 곳은 가로수길이 대기업에 점령당하자, 임대료가 절반 수준인 세로수길로 옮겨 온 매장들도 있지만 상당수는 기존 주택을 개조한 소규모 음식점들이다. 일식집 도쿄맑음, 신발과 커피를 함께 파는 르 버니블루, 고급 샌드위치 집 부첼라, 페이퍼가든 등이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가로수길 건물주와 상인들을 대표하는 가로수회의 박동수 회장은 "가로수길 대로변은 대기업들 패션업체들이, 골목인 세로수길은 패션 보다는 특색 있는 개인 음식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며 "타 상권보다 구매력이 높은 젊은 고객들이 많이 찾는다"고 말했다.
가로수길에서 30년 이상 부동산을 운영해 온 심문복 동방컨설팅 대표는 "가로수길은 초기 상권을 키워왔던 작은 매장들이 사라져 이제는 별 특색 없는, 또 하나의 화려한 거리로 변모해가는 느낌"이라고 아쉬워했다.
번잡한 이태원 인근의 경리단길은 지하철 6호선 녹사평역 2번 출구 건너편에서 남산3호 터널 방향으로 600m 내려가 우회전하면 입구가 나온다. 하얏트호텔까지 이르는 약 950m의 언덕길인데, 육군중앙경리단이 위치하고 있어 경리단길로 불린다.
경리단길 차로 양 옆으로 작은 음식점들이 늘어서 있지만 그 뒤는 주택가다. 이곳 역시 이태원보다 권리금이나 보증금은 50%가량 저렴한 수준. 프랜차이즈 커피숍이나 레스토랑 대신 태국음식점 부다스벨리, 중식당 마오 등 작은 규모의 이국 음식점들이 많으면서도 한적해 직장인이나 외국인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몬스터컵케이크, 더페이지, 올리아키친 등도 맛집으로 손꼽힌다. 위치가 좋은 곳은 남산타워를 감상할 수도 있다. 이태원동에 있는 광고회사 제일기획에 근무하는 김남훈씨는 "교통편이 애매해 자주 찾지는 못하지만 이태원보다 덜 붐비고 조용해 가끔 찾는데 색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홍대 옆 연남동은 6개월 전부터 홍대와의 경계지점부터 연남동 방향으로 커피, 맥주, 칵테일 등을 파는 카페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홍대 앞은 클럽과 개성 있는 패션, 카페를 특징으로 한 때 예술의 거리로 불렸던 곳. 하지만 인파가 몰려들면서 임대료가 폭등해 댄스클럽, 주점들이 그 자리를 차지한 지 오래다. 30년간 홍대 앞 명소로 불렸던 리치몬드 과자점도 비싸진 임대료에 문을 닫았고, 그 자리엔 롯데 엔제리너스가 입점했다. 그러다 보니 화려하고 번잡한 홍대 거리 대신 합정동, 상수동에 이어 연남동, 연희동까지 상권이 확장하고 있는 추세다.
홍대 앞 예술시장 프리마켓으로 유명한 일상예술창작센터, 카페 주다야싸 망명정부 등도 연남동에 터를 잡았다. 연남동 부동산 1번지 관계자는 "과거 철길을 따라 음식점들이 하나 둘씩 생기고 있는데, 철길 자리에 조성되는 공원이 내년 상반기 완공되면 젊은이들의 유입이 크게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처럼 잘나가는 동네의 옆 동네까지 새로운 장소로 뜨고 있지만 이곳 역시 나중에는 대기업들 매장이나, 거대 유통업체의 프랜차이즈 거리가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부동산업계 관계자는 "초기에 개성과 특색으로 상권을 키웠던 개인 점포들이 상권이 뜬 후에는 대기업들이 차지하면서 임대료를 견디지 못해 쫓겨나고 있다"며 "이렇게 되면 어디를 가나 똑같은 프랜차이즈 거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고은경기자 scoopkoh@hk.co.kr
김현수기자 ddacku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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