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원 유모(43)씨는 요즘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다. 2008년 8월 서울 강동구의 한 아파트를 매입하면서 대출받은 2억8,000만원의 상환 일자가 다가왔기 때문이다. 당시엔 부동산이 호황기였던 데다 강동구 일대의 재건축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무리를 해서라도 구입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전세금 2억2,000만원과 예금 6,000만원에다 부족한 금액을 대출받아 총 5억6,000만원에 120㎡ 규모의 아파트를 구입했다.
유씨는 재건축이 확정돼 보상을 받거나 집값이 오르면 처분할 생각이었지만, 재건축 결정은 차일피일 미뤄졌고 아파트 시세는 구입 당시보다 5,000만원이나 떨어졌다. 주택담보인정비율(LTV) 규제(수도권 50%, 이외 60% 적용)에 따르면 대출한도를 초과한 3,000만원을 상환해야만 대출 연장이 가능한 상황. 유씨는 당장 돈을 구할 곳이 마땅치 않아 고민하다가 최근 신용대출을 받기 위해 은행 창구를 찾았다. 그런데 은행 직원은 LTV 초과분 상환을 요구하지 않은 것은 물론, 기존 금리조건 그대로 1년을 더 연장해줬다. 유씨는 "은행원이 이렇게 고맙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며 "추가 부담 없이 상환 일자를 1년 연장한 것은 다행이지만, 집값이 오르지 않는 한 대출을 상환할 방법이 없어 시한폭탄을 안고 있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집값 하락으로 'LTV발(發) 가계부채 대란'이 현실화할 것이라는 우려가 팽배했으나 금융당국의 지도로 큰 혼란은 빚어지지 않고 있다. 은행들이 LTV 한도를 초과하는 대출원금을 상환하지 않아도 만기 연장을 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하나은행은 금융당국의 대출자 부담완화 권고가 있기 전인 올해 1월부터 6월까지 LTV 상한(60%)을 초과하는 주택담보대출 총 2,076건(1,994억원) 중 93.1%인 1,933건(1,787억원)을 연장해줬다. 중도 상환한 57건(97억원)을 감안하면 대부분 연장해준 셈이다. 하나은행 관계자는 "신규대출자에겐 LTV를 반드시 적용해야만 하지만 만기 연장 때는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다른 시중은행도 상황은 비슷하다. 심지어 만기가 도래한 주택담보대출의 LTV 한도 초과분을 제대로 따져보지 않고 연장해주는 경우도 허다하다. 우리은행 관계자는 "올해 만기가 되는 주택담보대출 건수는 6월 말 현재 1만여건(4조6,000억원) 정도"라며 "만기 연장 때 LTV는 고려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신용에 문제만 없다면 금리를 0.1% 정도 추가해 연장해주고 있다"고 전했다.
국민은행 관계자 역시 "기존 대출을 연장하는 경우엔 LTV를 반드시 적용해야 한다는 규정이 없는 만큼 신용등급이 떨어지거나 실직 등으로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을 제외하곤 대부분 연장 조치를 해주고 있다"고 말했다.
문제는 집값 하락세가 지속될 경우 은행권의 '묻지마 연장'이 가계부채의 뇌관을 자극하는 기폭제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회사원 김선중(38)씨는 2006년 매입한 경기 파주시의 아파트(181㎡형)가 팔리지 않는 상황에서 대출 만기가 다가와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는데, 은행에서 대출을 연장해주겠다는 연락이 와 한시름 놓았다. 이 아파트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직전 8억원까지 올랐지만, 이후 하락하기 시작해 4년 만에 반토막이 났다. 김씨가 당시 아파트 구입을 위해 은행에서 빌린 돈은 3억3,000만원. 현재 매매 시세는 4억원대 초반이다. LTV 상한을 20% 이상 초과해 1억원 정도를 토해내야 했지만 은행이 선선히 만기를 연장해주겠다고 나선 것이다.
하지만 김씨의 집값이 더 떨어져 대출금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 되면, 은행은 손실을 고스란히 떠안을 수 밖에 없다. 김씨는 "당장 상환할 능력이 안돼 만기 연장 조치가 반갑기는 하지만, 매달 150만원씩 내는 이자도 감당하기 어려운데 대출원금을 어떻게 갚을 지 막막하기만 하다"고 토로했다.
김씨뿐만이 아니다. 상당수 대출자들이 집값 하락과 실질소득 감소로 만기 연장에 목을 매고 있다. 하지만 경기가 급격히 좋아지거나 집값이 오르지 않는 한 부채 축소는 요원한 게 현실이다. 가계부채의 부실을 막기 위한 특단의 대책이 시급한 이유이기도 하다.
박관규기자 ac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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