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파일의 빈 문서를 열어놓고 뭔가 쓰려할 때 내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서체 고르기다. 연필을 손에 쥐기 시작했을 때부터 글씨 흉내내기를 즐겨했던 터라 내 조상이 추사였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기도 했던 나, 서예학원을 줄곧 다녔음에도 지금 이 모양인 걸 보니 딱 예까지가 내 타고남이 듯하다.
각설하고, 폰트에 매료되는 과정 가운데 때때로 암초에 걸린 바 있었으니 이는 우리 서체들이 가진 다양성 속 어찌할 수 없는 확신없음이었다. 꼭 명조로 쓰란 법은 없는데 책의 본문 대부분이 그렇게 익숙해져버려 혹여 고딕이라 할 때 가지는 반감이 큰 터, 어쩌면 서체들 또한 작금의 우리들처럼 부익부빈익빈에 이르른 건 아닌가 싶었다.
그와중에 나는 컴퓨터가 아닌 예전 수공예 방식으로 찍어내던 활판 글자들을 오래 흠모해왔다. 내가 읽어온 책들이 다 그러한 모양새였고, 그 활자들은 자음과 모음을 하나하나 짚어주었으며, 무엇보다 뒷장까지 배겨나서 손으로 만질 때의 울림 같은 걸 전도했다. 해서 전국에 딱 하나라는 활판공방을 찾아갔다.
모두가 빠르고 편함을 고수할 때 느리고 불편함을 감내하는 그곳에서 나는 마치 깊은 산사에 온 듯한 고요 속 글자들의 침묵과 마주했다. 왜 이런 역사를 뒤로 밀려나게 할까, 왜 나서서 귀하다 아깝다 궁둥이 쳐주는 격려를 몰라하는 걸까. 심심하면 편의점에 들러 쭈쭈바를 빨 게 아니라 활판공방에 들러 납 활자를 눈으로 만질 것, 어젯밤 내 일기.
김민정 시인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