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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선명 통일교 총재 별세/ "평화만 얘기하며 살았는데 세상이 거부" 자서전서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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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선명 통일교 총재 별세/ "평화만 얘기하며 살았는데 세상이 거부" 자서전서 고백

입력
2012.09.03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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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름 석 자만 말해도 세상이 와글와글 시끄러워지는 세상의 문제 인물입니다. 돈도 명예도 탐하지 않고 오직 평화만을 이야기하며 살아왔을 뿐인데 세상은 내 이름자 앞에 수많은 별명을 덧붙이고 거부하고 돌을 던졌습니다. 내가 무엇을 말하는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는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고 그저 반대부터 했습니다.”

3일 별세한 문선명 통일교 총재가 2009년 구순(九旬)을 앞두고 펴낸 자서전 (김영사 발행)에서 자신의 삶을 이렇게 고백했다. ‘세계적인 종교인’과 ‘기독교 이단 교주’라는 극단적인 평가를 받아 온 자신의 삶을 이렇게 집약적으로 표현했다.

1920년 평북 정주의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고인은 고향에서 소학교를 마치고 서울 경성상공실무학교를 마친 뒤 일본에 건너가 와세다 고등공학교에서 1년 남짓 수학했다. 귀국 후 토목회사 전기기사로 일하면서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해방이후 1950년대 중반까지 북쪽과 남쪽에서 사회 문란혐의로 구속되는 등 모두 6차례 수감됐다.

통일교의 출발은 6ㆍ25전쟁이 끝난 다음 해인 1954년 5월 서울 성북구 북학동 판잣집에 ‘세계기독교통일심령협회’ 간판을 내걸면서다. 1994년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으로 이름을 바꿨다가 2010년 2월부터 통일교라는 이름을 쓰고 있다.

문 총재는 해외 선교에도 일찍 눈을 떠 1957년 일본을 필두로 1972년 미국에도 진출했다. 1976년 워싱턴 DC 모뉴먼트 광장에서 30만명 가까운 인파를 동원한 집회를 열면서 시사주간지 가 선정한 ‘올해의 인물’에 올랐다.

통일교는 50년 만에 전 세계 194개국에 300여만 명의 교인을 거느린 종교단체로 성장했다. 특히 ‘순결한 가정’을 기치로 1961년 36쌍의 첫 합동결혼식 시작으로 1992년 8월 서울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3만쌍 국제합동결혼식을 거행해 큰 화제가 됐다.

1970, 80년대 남북통일의 이념적 대안으로 승공사상과 좌ㆍ우익을 아우르는 두익(頭翼)사상운동을 주창했고, 국제평화운동에도 관심을 보이며 초종교초국가연합ㆍ평화유엔ㆍ천주평화연합을 창설했다.

북한과의 인연은 각별하다. 1991년 11월 평양을 방문해 당시 김일성 북한 주석을 만나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북한에 ‘교회와 평화센터’와 평화자동차 공장 설립을 허락 받아 일찍이 대북 사업에도 진출했다.

고인은 또한 교육ㆍ문화 사업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선문대, 선화예술중ㆍ고교, 청심국제중ㆍ고교 등 8개 학교를 거느린 선문학원을 세웠고, 리틀엔젤스(선화어린이무용단)와 유니버설발레단을 운영하는 한국문화재단, 세계일보, 미국 UPI, 워싱턴타임스, 일본 세계일보 등 언론기관, 일화, 용평리조트, 일신석재, 청심국제병원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50개의 단체와 기업을 세웠다.

그는 종교단체로는 이례적으로 기업활동까지 하며 재산을 수조원대로 키웠지만 ‘이단’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국내 기독교계는 그가 성서의 불완전성을 주장하며 지상천국을 강조하는데다 기독교와 다른 삼위일체론을 내세우며 자신을 메시아라고 암시하는 점 등을 들어 통일교를 이단으로 규정했다.

고인은 평생 하루 3시간 정도의 토막 잠만 잘 정도로 남다른 건강을 유지한 것으로 유명하다. 타고난 건강체질이면서도 ‘수수체조’라는 기체조를 개발해 매일 아침 20분 정도 빼놓지 않고 계속해왔다. 고인은 특히 2008년 7월 부인 한학자(선문학원 이사장ㆍ세계평화여성연합 총재)씨와 손자ㆍ손녀 등 일가족 14명이 타고 가던 헬기가 경기 가평 장락산 중턱에 불시착한 뒤 폭발하는 아찔한 사고를 당했지만 별다른 부상을 입지 않는 구사일생의 천운이 따르기도 했다.

고인은 40세 되던 1960년 23세 연하의 한씨와 결혼했으며 슬하에 7남6녀를 두었다. 1983년에는 둘째 아들(흥진)을 교통사고로 잃었고, 1999년에는 6남(영진) 2008년에는 장남(효진)이 숨지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권대익기자 dk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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