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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연재소설 여울물소리] 5. 하늘과 땅과 사람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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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연재소설 여울물소리] 5. 하늘과 땅과 사람 <112>

입력
2012.09.03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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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바깥 툇마루에 인기척이 있더니 어흠, 하는 헛기침 소리가 들려와 잠시 기다렸다가 물어보았다.

누구 왔소?

예, 저 안 서방입니다.

문을 밀치니 그가 빙긋 웃으며 서 있었다.

이제 날두 풀렸는데 나들이 안 가시렵니까?

막음이 아버지가 내 속을 잘 알고 그러는 줄 알고 있었다.

좀 들어오세요.

안 서방이 문가에 들어와 앉더니 한마디 했다.

어떻게 공부가 좀 되십니까?

네? 아 그게…… 저 들으셨군요.

예, 저는 그 주문하구 칼노래는 압니다만.

칼노래는 또 뭔가요?

안 서방이 얼른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그건 아무 데서나 부르면 안 됩니다. 지난번 난리 때에 농민군이 행군하고 쌈하러 가면서 부르던 노래라서.

한번 불러보우.

에이 방 안에서 숨죽이고 부를 노래가 아니라니까요. 관군이나 순검들 들으면 경칩니다.

나는 자꾸만 졸랐고 그는 못이긴 것처럼 목소리를 낮추어 조그맣게 읊조렸다.

시호시호(時乎時乎) 이내시호 부재래지(不再來之) 시호로다

만세일지장부(萬世一之丈夫)로서 오만년지시호(五萬年之時乎)로다

용천검 드는 칼을 아니 쓰고 무엇 하리

무수장삼 떨쳐입고 이 칼 저 칼 넌짓 들어

호호 망망 넓은 천지 일신으로 빗겨 서서

칼노래 한 곡조를 시호시호 불러내니

용천검 드는 칼은 일월을 희롱하고

게으른 무주장삼 우주에 덮여 있네

만고명장(萬古名將) 어디 있나 장부당전(丈夫當前) 무장사(無壯士)라

좋을시고 좋을시고 이내 신명(身命) 좋을시고

용천검 드는 칼이 해와 달을 희롱한다는 대목에서 안 서방은 흥을 못 참았든지 허리춤에 질렀던 곰방대를 빼어 허공을 휘두르며 앉은자리에서 일어설 듯이 어깨춤을 들썩였다. 나는 숨을 죽이고 지켜보았으니 대신사의 숙연한 흥취를 짐작하겠기 때문이었다. 내가 한 번 더 해보라고 조르니 안 서방은 제풀에 사그러진 것처럼 고개를 흔들었다.

에이 고만 할랍니다. 이 노래만 부르면 자꾸 우금치서 죽은 사람들 생각나서. 그리고 그전부터 행수님들은 칼노래 부르지 말라구 그랬지요.

예? 그게 무슨 말씀이지요?

큰 스승님께서 이 노래를 지은 뜻은 후천개벽이 오는 기쁨을 시늉한 것인데, 세상 사람들은 이 노래로 역적죄를 씌웠다구요.

칼춤이야 기녀나 무녀들도 흥겹게 춥니다. 삿됨과 슬픔을 베어 뿌리치는 춤사위니 까마득하게 오래된 춤이지요.

이 서방은 농악 장단에 대나무 작대기 들고 곧잘 칼노래를 부르면서 한바탕 춤을 추었습니다.

나는 백지를 꺼내어 막음이 아버지가 불러주는 대로 이 노래를 적어두었다. 음과 장단은 귀로 들어 아는 바이라 혼자 흥얼거려보기로 했던 것이다.

아무래도 상단의 출발 무렵에 떠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상단은 오랜 경험으로 농번기의 틈새에 장터를 찾아 각처로 흩어지기 때문이었다. 이월 중순이라 봄빛은 완연했지만 아직도 바람은 싸늘했고 꽃샘추위로 꽃망울도 움츠려 있을 무렵이었다. 안 서방이 여정을 어림짐작하여 우선 갱갱이에서 금강 뱃길을 따라 공주까지 올랐다가 거기서부터 육로를 따라 예산으로 갈 작정이었다. 안 서방은 이번에 장쇠를 데리고 가기로 했는데 곁꾼도 한 사람 붙여서 나 외에 남정네가 셋이나 되어 든든했다. 우리 집에서 객주 붙였던 어염 짐을 싣고 부여와 공주에 가서 풀어먹일 생각이던 것이다. 이신통만 없었다면 엄마 먼저 가신 뒤에도 이렇듯 집안에 좋은 식구들이 남아 있었으니 이게 무슨 복인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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