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외건설協 부회장직은 선후배 간 물려주기가 아예 굳어져
# 2007년 2월 국토해양부 전신인 건설교통부 중앙토지수용위원회 상임위원(1급)을 끝으로 공직에서 물러난 강모씨. 퇴직은 그에게 억대 연봉과 기사 딸린 승용차, 비서 등이 제공되는 화려한 인생 2모작의 시작일 뿐이었다. 그는 퇴직과 동시에 해외건설협회 부회장으로 자리를 옮겼고, 2년 임기가 끝난 뒤에는 국내 시공순위 60위권인 중견 건설사 대표이사로 영입됐다. 이어 2010년 7월부터 25개월째 지방공기업 사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강씨가 퇴직 후 66개월 동안 백수로 지낸 기간은 6개월이 채 안 된다.
# 2005년 6월 건교부 1급으로 퇴직한 정모씨. 그는 같은 해 말 산하 연구기관장으로 재취업했고, 2008년 1월에는 건교부 이력을 활용해 지방광역시 부시장으로 자리를 옮겨 2년6개월 동안 근무했다. 이어 2010년 11월부터 지역발전 전략을 담당하는 지방공공기관 원장으로 21개월째 재직 중이다. 정씨는 퇴직 후 86개월 중 77개월째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2005년 이후 국토해양부에서 퇴직한 3급 이상 고위관료 47명의 재취업률은 100%. 대부분 산하기관장이나 유관단체장으로 자리를 옮겼고, 대형 건설사 대표나 항공사 고위임원으로 영입된 경우도 있었다. 이들은 국토부 경력이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에서 발주하는 각종 공공 개발사업 수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비판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한국일보가 국토부 고위 퇴직관료 47명의 행적을 추적한 결과 퇴직 후 휴직기간은 100일 당 평균 16.1일에 불과했다. 100일 중 84일은 일을 했다는 뜻으로, 직장을 갈아타는데 시간이 별로 걸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직급별로 보면 차관 6명은 100일 중 28일로 휴직기간이 상대적으로 길었다. 하지만 1급 13명은 100일 중 11일, 2∼3급 28명은 100일 중 16일로 취업의 연속성이 거의 끊기지 않았다. 퇴직 전 자신이 가고자 하는 산하기관이나 유관단체의 자리를 보장받고 신속히 옮겼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모 차관의 경우 유관 민간연구기관장, 경제자유구역청장, 지방공기업 사장 등을 잇따라 지내며 퇴직 후 54개월 동안 쉬었던 기간이 전무했다. 또한 최근 3년 내 퇴직한 29명 중 18명(62%)은 퇴직 후 한 달도 안 돼 유관기관 및 기업 등에 재취업했으며, 일부는 국토부 경력을 활용해 선출직 시장이나 광역시 정무부시장으로 진출하기도 했다.
토건 마피아들은 퇴직 후 좋은 자리를 독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선후배끼리 자리 물려주기에도 능숙하다. 해외건설협회 부회장 자리는 아예 국토부 퇴직관료 몫이다. 2009년 2월 건교부 1급 출신 강모씨가 2년 임기를 끝내자, 국토부 2급 출신 원모씨가 이어 받았다. 새만금군산경제자유구역청장 자리도 마찬가지. 차관 출신 이모씨가 2년간 재직 후 다른 직장으로 옮겨가자 2010년 9월부터 서울국토관리청장을 지낸 이모씨가 2대 청장 자리를 물려받았다.
토건 마피아들이 유관단체나 기관을 독식하면서 철옹성 같은 '그들만의 리그'가 만들어지다 보니 각종 비리에 연루된 선배들까지 챙기는 등 모럴 해저드도 심각하다.
남모씨는 2006년 11월 건교부 기반시설본부장 재직 당시 알고 지내던 건설업체 대표에게서 수도권서부(수원∼광명) 민자고속도로 사업 추진과 관련해 편의를 봐달라는 청탁과 함께 2,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지난해 8월 대법원에서 징역 1년6월, 추징금 2,000만원을 선고 받았다. 하지만 남씨는 올해 3월 보란 듯이 민자고속도로업체 사장에 취임했고, 업계에선 토건 마피아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손모씨는 2006년 12월 건교부 퇴직 후 건설근로공제조합 이사장을 지내면서 부실 골프장 인수자금 300억원을 시중은행에 특정금전신탁 형태로 투자하고 1억2,000만원을 챙긴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토건 마피아의 비리가 끊이지 않는 데는 유관단체나 민간기업으로 옮길 경우 최소 1억~2억원대 연봉이 보장되기 때문에 일정 부분 로비스트 역할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적 요인도 있다는 지적이다. 민주통합당 장하나 의원은 "토건 마피아들이 현직 때부터 퇴직 이후를 대비해 업계 이익에 맞는 정책을 수립하는 등 사회간접자본(SOC) 정책 결정 구조가 토건 세력의 이익을 대변하는 게 가장 큰 문제"라고 말했다.
환경운동연합 이철재 정책처장은 "국토부 퇴직관료들이 현직 후배들과 토건 카르텔을 형성하면서 특정 업체에 일감을 몰아주는 등 공정 경쟁을 저해하고 있다"며 "토건 마피아 탓에 대규모 개발사업에 대한 검증과 평가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배성재기자 passion@hk.co.kr
■ 토건마피아 전관예우 왜 못막나
2010년 2월 국토부 서울국토관리청장에서 물러난 김모씨는 바로 다음 달 유관단체인 대한설비건설공제조합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행정안전부 산하 공직자윤리위원회는 김씨가 퇴직 전 담당한 업무와 공제조합 간 업무 연관성이 있다고 판단했고, 이를 근거로 국토부는 공제조합에 이사장 해임을 요구했다. 그러자 김씨는 국토부 장관을 상대로 취업해제조치 취소소송을 제기했고, 같은 해 8월 서울행정법원은 김씨의 손을 들어주었다.
재판부는 "국토관리청이 발주하는 건설공사는 주로 도로, 하천 등 대규모 토목공사로 계약권한이 대부분 조달청장에게 있다"며 "건축 기계설비 분야를 주 업종으로 하는 조합과의 연관성이 크지 않아 취업해제 조치는 위법하다"고 판시했다.
낙하산이 확실해 보이는 유관단체 취업인데도 제도적으로 규제하기는 만만치 않은 게 현실이다. 현행 공직자윤리법은 퇴직 공무원의 공공기관 취업에 제한을 두고 있지 않지만, 퇴직 전 3년 내 소속했던 부서의 업무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유관단체나 민간기업에는 퇴직 후 2년간 취업을 금지하고 있다.
하지만 공직자윤리법의 취지에도 불구하고 퇴직관료들의 유관단체 취업은 지금도 줄을 잇고 있다. 김씨의 사례에서 보듯 이들이 소송을 내면 법원이 퇴직 공직자의 취업 제한보다는 직업 선택의 자유에 더 가치를 두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퇴직 관료의 로펌 행을 규제하지 않는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고위관료들이 퇴직 후 로펌 고문 등으로 자리를 옮겨 사실상의 로비스트로서 정부 정책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만, 관련 규제는 전무한 실정이다. 국토부 차관 출신 김모씨도 2009년 1월부터 한 대형 로펌의 고문으로 일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허점투성이인 공직자윤리법의 취업제한 규정을 한층 강화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아울러 퇴직관료들이 명예를 지키면서 전문성도 살릴 수 있도록 연구기관이나 학계로 진출할 수 있는 여지가 확대돼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협성대 라영재 교수는 "공직자윤리위원회가 법과 제도를 좀 더 꼼꼼하고 촘촘하게 운용해 취업제한 규정을 까다롭게 적용해야 한다"며 "특히 사익 추구를 위해 민간 대기업과 로펌으로 가는 건 철저히 막을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라 교수는 이어 "고위관료 출신들이 퇴직 후 명예롭게 자신의 경험과 네트워크를 활용할 수 있도록 사회구조를 선진적으로 변모시키는 것도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퇴직관료들이 보수가 적더라도 국가와 사회를 위해 기여할 수 있는 일자리를 좀더 늘려야 한다는 것이다.
배성재기자 passion@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