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션 스쿨인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이었다. 1주일에 한번 전교생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시간이 있었는데, 하루는 스님이 오셔서 설교를 하셨다. 본인이 불교에 귀의했으나 기독교를 알게 되어 개종했다는 내용의 설교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도 그냥 목사님 보다는 스님이라는 타종교에서 권위를 가진 분조차 기독교가 바른 종교임을 인정했음을 보여주는 것이 초청의 목적이 아니었나 싶었다. 그런데 몇 주 후 큰 반전을 접하게 되었다. 주요 일간지에서 조계종에서 발표한 보도 자료를 소개했는데, 내용인즉 그 기독교로 개종했다는 스님이 자신들과는 전혀 관련이 없고, 승적도 없는 분이라는 것이다. 공인도 안 된 분이 자신의 권위를 이용해 타 종교를 비난한 것 같아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과학 칼럼 쓰는 난에서 오래 전 이야기를 이렇게 장황하게 늘어놓고 있는 이유는 최근 고교 과학 교과서에서 진화와 관련된 부분을 수정하기로 한 내용을 접한 뒤 그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사실 종교적 체험이나 신념은 일반적인 자연과학으로는 설명이 어려운 부분이 많다. 그렇지만 이번 논쟁을 촉발시킨 '교과서진화론개정추진위원회'나 이 조직의 이론적 배경을 제공하고 있는 '창조과학회'의 구성원 면면을 보면 이 문제는 종교와 과학 간의 논쟁 문제가 아닌 듯이 보인다. 왜냐 하면 진화론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 분들 대부분이 목사님이나 철학자들이 아니라 대학에서 교수직을 수행하고 있는 과학기술자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중들에게는 마치 과학계 내에서의 논쟁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분들 대부분이 생물학 전공자가 아니거나 생물학 전공자인 경우에도 '진화생물학'과는 거리가 먼 분들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분들이 진화론의 문제를 '과학적인' 논쟁인양 자신의 교수라는 권위를 이용해 떠들고 다니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10여 년 전 필자가 참여한 논문이 '네이처'지에 게재된 적이 있었다. 어느 날 우연히 어떤 웹사이트에서 이 논문을 소개한 글을 읽게 되었다. 그 사이트는 박사 부부가 운영하는 사이트로 '기후변화가 허구'임을 증명하기 위한 과학적 논쟁의 장이라는 소개가 붙어 있었다. 내 논문을 소개해 준 것은 감사하나, 긴 논문의 내용 중 한두 문장만을 인용해 기후변화가 잘못된 이론이라는 것이 또 밝혀졌다는 식의 아전인수격 설명에는 약간 부아가 치밀기도 했다. 틀릴 가능성에 대해 항상 조심스러운 과학자들의 논문과 이론체계에서 한두 문장이나 부분적인 그래프로 전체 결과를 호도하는 것은 잘못된 논리 전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유회사의 물질적 지원이 끊긴 이 사이트는 그 이후에 어찌되었는지 알 길이 없다.
나는 기독교인들의 종교적 신념을 무시하거나 창조과학회에 참여하는 분들의 자기전공 분야에서의 자질을 비평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렇지만 전문성이 없는 분야에 대해서 자신의 직위가 가져다 주는 권위를 이용해 마치 과학적인 토론인양 주장을 펴는 것은 옳지 못하다. 진화론은 몇몇 생물학자들이 '신념'에 근거해서 주장하는 이론이 아니라, 지질학, 해양학, 기후학, 지구물리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가 같은 방향을 지시하고 있는 이론체계이다. 유전자가 무엇인지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진 바 없던 시절에 제시된 이론이지만, 현대 과학의 총아인 분자생물학이 발전하면 할수록 진화론이 더욱 정확한 설명체계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모든 과학 이론은 틀릴 수 있으나 그러기 위해서는 기존의 이론체계에 반하는 증거가 하나 둘씩 점차로 나타나야만 한다. 진화론은 시간이 갈수록 그 반대로 가고 있다. 과학의 중요한 속성은 틀릴 가능성을 인정하는 점과 가설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속성이다. 이런 특성이 없는 신념이나 이론체계로 과학적 이론과 논쟁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종교적 신념은 자신의 삶과 종교 생활에서 발현되어야 하지 과학적 속성을 가지지 않은 채로 과학의 논쟁에 뛰어드는 것은 옳지도 않고 위험하기 그지없는 생각이다. 전문적 지식이나 신념체계가 완성되지 않은 중고등학생에서 진화론을 정확히 가르쳐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강호정 연세대 사회환경시스템공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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