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 이러한 헤아림이여 확실히 알고 있는 것으로부터 세상사를 바라보면 점점 분명하게 알 수 있지만 불확실한 것을 탐구해서 세상사를 알려하면 점점 애매해져서 알기가 어렵다.
이렇듯 드러난 현상으로부터 자연의 섭리를 추구하여 현상과 이치를 밝히는 대업을 이룬 것이 머나먼 옛날의 일이다. 하물며 그로부터 무수한 세월이 흐른 지금 어찌 앎이 없다고 말할 수 있으랴. 성인들이 이치를 밝힌 지 몇몇 성상이었던가. 천황씨가 살던 때나 지금이나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어찌해서 운(運)이란 말이 있고 어찌해서 복(復)이란 말이 있다는 말이냐. 사람이 식견으로 판단하여 알 수 있는 것이 기연(期然)이라면 사람이 일반적인 식견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불연(不然)이라, 기연이 없이 어찌 불연에 도달할 수 있으며 불연이 없다면 어찌 기연이 있을 수 있는가. 불연 기연이 하나임과 같이 하늘과 사람은 하나이니 시천주(侍天主)가 가하도다. 모심〔侍〕은 안으로는 신령함이 있고 밖으로는 기화가 있어〔內有神靈 外有氣化〕 온 세상 사람들이 각기 깨달아 옮기지 않아야 한다.
태초에 허허 창창한 어둠 가운데 하늘과 땅이 비로소 열림으로 우주가 형성되었으니 모든 물(物)의 시작이더라. 하늘과 땅이 처음 열린 것을 선천개벽이라 하나니 물질 우주의 개벽이라. 이제 그 가운데 사람이 생겨나 세상과 스스로를 바꿀지니 후천개벽을 열어야 함이로다. 모름지기 천도를 닦는 이는 정성을 다하여 자신과 세상을 후천개벽으로 이끌어야 하느니라.
철종 십사 년 계해(癸亥) 겨울 십이월에 대신사께서는 경주에서 체포되었고 서울로 압송당했다가, 임금의 승하로 대구 감영으로 내려와 갖은 고문을 당한 끝에 이듬해인 신자(申子) 봄 삼월에 남문 밖 관덕정 앞뜰에서 효수형을 받았으니 죄목은 혹세무민과 모역죄였다.
대신사께서 형을 받기 하루 전에 마지막 심문으로 주뢰형을 받아 정강이뼈가 부러지는 고초 속에서도 담뱃대에 서신을 말아 넣어 밖으로 전하였으니 신사께서 이를 받아 기록하였다.
등명수상무혐극(燈明水上無嫌隙)
주사고형역유여(株似枯形力有餘)
등불이 물 위에 빛나니 온 세상을 밝힐 것이요
기둥이 제법 말랐으니 떠받치는 힘 넉넉하리
불이 물 위에 있으니 이는 주역 육십사 괘(卦)의 마지막 끝자리인 화수미제(火水未濟) 형상이다. 주역은 순환과 변화의 것이라서 불이 위에 물이 아래, 하늘이 위에 땅이 아래면 자연에서처럼 정위치가 아니라 통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으며 막히고 멈춰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늘과 땅도 천지부(天地否)가 아니라 지천태(地天泰)로 소통되어야 한다. 바로 앞의 육십삼 괘인 수화기제(水火旣濟)가 이미 이루어진 완성을 뜻하듯이 화수미제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옛 성인이 이 괘를 모든 것의 마지막 자리에 놓은 것은 우주의 무궁한 순환을 가르치려는 것이며 이는 미완으로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제부터 새로운 시작이니 온 세상이 밝아질 것이라는 가르침이다. 대신사께서 천도를 세상에 밝히는 일은 나의 죽음으로 완성되는 것이요 이제부터 새로운 시작으로 세상을 열어가는 일은 그대들의 몫이다 하는 유언이니라.
나는 단숨에 읽었고 다시 천천히 글귀마다 마음속에 새기며 몇 번이나 되풀이하여 읽었다. 휘갈기지 않고 단정하고 반듯하게 써내려간 이신통의 언문 글씨는 알아듣기 쉽고 앞뒤가 정연하였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풀이를 써내려갔는지 내게도 전해지는 것 같았다. 나는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올 때까지 뒷방에 틀어박혀 꼼짝도 않고 지냈다. 스물한 자의 주문을 저절로 외우게 되어 중얼중얼 하다가 소스라치게 놀라 주위를 돌아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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