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바니아에 사는 아부 바케르 카심(43)은 피자 요리사다. 중국 서부 신장(新疆)위구르자치구가 고향인 그는 미국 관타나모수용소를 거쳐 이곳에 왔다. 알바니아가 지도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던 그가 이런 인생역정을 겪게 된 것은 자신의 표현대로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장소'에 있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하지만 그의 삶은 강대국들의 힘이 작용하는 시공간의 자기장 속에서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흘러갔다.
위구르족인 카심이 고향을 떠날 때 품었던 희망은 평범했다. 키르기스스탄과 카자흐스탄을 오가며 가죽 제품을 팔던 그는 가죽 산업이 발달한 터키에 가서 장사를 하고 싶었다. 소수민족을 탄압하는 중국 정부가 해외거래 규제를 강화하고 비리 조사에 나선 것도 그가 처자를 두고 먼 길을 떠난 이유였다. 키르기스스탄을 거쳐 파키스탄에 도착한 그는 이란 행 비자를 신청했다. 비자를 기다리는 동안에는 주위의 권유로 아프가니스탄 위구르족 마을에 머물렀다. 그때가 2001년 가을이었다. 9ㆍ11테러를 겪은 미국이 아프간 공격을 시작한 시점이다. 그가 머물던 위구르족 마을은 알카에다의 오사마 빈 라덴이 은신한 것으로 알려진 아프간 동부 토라보라 인근 산악지대에 있었다. 그해 10월 미군의 폭격이 시작되자 카심은 동료들과 함께 파키스탄 산악지역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현상금을 노린 파키스탄인들은 한 명당 5,000달러씩을 받고 이들을 미군에 넘겼다. 카심은 6개월간 아프간 칸다하르의 미군기지에 수감된 뒤 2002년 6월 미군의 운영하는 관타나모수용소로 이감됐다.
'적 전투원'으로 분류된 그는 관타나모에서 기약 없는 수감생활을 시작했다. 재판도 없는 불법구금에 대한 국내외 비판이 높아지자 미국은 2004년 9월에야 재판을 시작했다. 카심의 혐의는 위구르족 마을에 세 달간 머물면서 코란을 공부하고 AK-47 소총 훈련에 참가했다는 것. 그는 진술서에서 "중국에서는 코란을 배울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기쁜 마음으로 코란 학습을 했고 주위에서 쓸모가 있을 것이라고 해서 총 쏘는 법을 배웠다"고 밝혔다. 또 "알카에다나 탈레반은 알지도 못했고 미국과 싸우겠다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2005월 3월 그는 '더 이상 적 전투원 아님' 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카심은 갈 곳이 없었다. 그와 동료 위구르인 수감자들은 "소수민족을 탄압하는 중국으로 돌아가면 처벌을 면할 수 없다"며 중국 송환을 거부했다. 카심은 미국에서 살기를 원했지만 미국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미국은 100개 이상의 국가와 접촉했지만 어느 나라도 관타나모의 위구르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들의 본국 송환을 요구하는 중국 정부와 마찰을 겪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이 때 국민의 70%가 이슬람교도인 알바니아가 이들의 망명을 수용했다. 2006년 5월 5일 새벽 마침내 카심 등 위구르인 5명은 관타나모수용소에서 주황색 수감자 옷을 벗고 알바니아행 비행기에 올랐다. 찰스 가티 존스홉킨스대 교수는 "알바니아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을 열망하고 있었다"며 "이것이 망명 수용의 배경"이라고 뉴욕타임스(NYT)에 말했다. 딕 체니 당시 미 부통령은 알바니아의 NATO 가입을 공개적으로 찬성했고 알바니아는 2008년 4월 NATO 가입 승인을 받았다.
카심은 알바니아 도착 후 5월 23일 미 abc방송과 가진 첫 인터뷰에서 "관타나모는 정의도, 인간에 대한 존중도 없는 지옥"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 해 9월 NYT에 보낸 '관타나모에서'라는 기고에서 "9ㆍ11테러에 대한 얘기는 관타나모에 가서 처음 들었고 그것이 얼마나 큰 사건이었는지는 알바니아에서 인터넷으로 세계무역센터가 무너지는 사진을 본 후 알았다"며 "나도 희생자"라고 밝혔다. NYT는 2007년 그와 동료들의 사연을 소개하며 "거의 아무것도 모른 채 강대국들의 체스게임에 휘말렸다"고 전했다.
지난달 영국 BBC방송은 카심의 근황을 전했다. 그는 "변호사가 알바니아어와, 뭔가 생활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을 배우라고 권했다"며 "알바니아 사람들은 피자를 좋아하고 나는 요리를 좋아하기 때문에 피자 요리를 선택했다"고 했다. 그는 이슬람에서 인정하는 재료만 사용하는 '할랄 피자'를 만든다.
고향을 떠난 이후 처음으로 가족과 연락도 닿았다. 하지만 부인과 세 자녀를 다시 볼 수는 없었다. 알바니아와 중국 정부 모두 카심과 가족의 여권 발급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부인과 이혼하기로 합의했다. 지난해 위구르족 출신 아내를 새로 맞은 카심은 올해 딸을 얻었다. 아프간에서 영문도 모른 채 갇힌 지 10년여가 흘러서야 그는 피자를 구우며 자신의 인생을 찾아가고 있다. 미국은 2014년을 목표로 아프간 철군을 준비하고 있다.
류호성기자 rh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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