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잘 있어요?"
이 한 마디가 '납치ㆍ성폭행'이라는 끔찍한 범행을 예고하는 인삿말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집에서 잠들어 있던 어린 소녀는'이웃 삼촌'에게 이불 보쌈 하듯 잡혀가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무자비한 폭행뿐이었다. 어머니는 한밤 중에 홀연히 사라진 딸이 짐승으로 둔갑한 '이웃 삼촌'에게 무참히 짓밟히는 동안 PC방에서 게임에 빠져 있었다. 아버지는 술에 취해 잠들어 있었다.
제14호 태풍 덴빈이 강한 비바람을 뿌리던 30일 새벽 1시쯤 전남 나주시 영강길의 한 PC방. 비에 젖은 우산을 든 고모(23)씨가 동생(21)과 함께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이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요란한 컴퓨터 마우스 클릭 소리가 가득한 PC방을 서성이던 고씨는 게임에 몰두해 있던 A(7)양의 어머니 C(36)씨에게 다가갔다. 고씨는 "누님 오셨어요?"라며 다정히 인사를 했다. C씨의 집과 250m 떨어진 곳에 살고 있는 고씨는 평소 PC방을 즐겨 찾으면서 게임광인 C씨와 안면을 튼 사이였다. C씨는 전날 밤 11시부터 PC방에서 게임에 빠져 있었다. 태풍이 몰아치는 악천후에도 PC방을 찾은 C씨가 반가운 듯 "○○이 잘 있느냐"며 A양의 안부를 묻는 고씨의 입에선 역한 술 냄새가 났다. 고씨는 이어 빈 자리를 잡고 온라인 슈팅게임을 시작했다.
하지만 술에 취해 맘 먹은 대로 게임이 되지 않던 고씨는 10여분쯤 뒤 혼자 PC방을 빠져 나와 곧바로 70여m 떨어진 C씨의 집으로 향했다. 원래 분식집이었던 터라 유리문으로 된 출입문을 통해 거실에 자고 있는 A양 가족을 봤다. 고씨는 평소 출입문을 잠그지 않은 C씨의 집에 몰래 들어간 뒤 거실 가장자리에 잠을 자고 있던 A양을 이불에 싸서 빠져 나왔다. 당시 A양은 언니(12), 오빠(10), 여동생(2)과 나란히 자고 있었고, 아버지(41)는 만취해 안방에 쓰러져 자고 있었다.
잠시 후, 고씨의 어깨에 얹혀 끌려가던 A양은 몸이 심하게 출렁거리는 느낌에 잠에서 깼다. 그러자 고씨는 "삼촌이야, 괜찮아"라며 A양을 안심시켰다. 수상한 낌새를 눈치 챈 A양은 "살려달라"고 울먹였지만 쏟아지는 빗소리에 묻히고 말았다. 고씨는 C씨의 집에서 200m 정도 떨어진 영산대교 아래로 A양을 데려가 주먹으로 마구 때리고 성폭행한 뒤 달아났다.
얼마나 울었을까. A양은 겨우 몸을 추스려 경사진 콘크리트 제방 계단을 5m 가량 기어올라간 뒤 영산대교 인도에서 기절했다. 그로부터 10시간여 뒤인 낮 12시55분쯤 알몸 상태로 이불을 뒤집어 쓴 채 잠들어 있던 A양은 또 다른 인기척을 느끼자 몸서리를 쳤다. C씨의 실종 신고로 수색에 나선 경찰이 A양의 몸을 흔들어 깨우자, 어린 소녀는 또 다시 끔찍한 짓을 당하는 줄 알고 몸부림을 쳤다. A양은 "얼굴도 모르는 아저씨에게 납치돼 성폭행을 당했다"고 울먹이며 말했다. A양은 병원으로 옮겨지면서도 만신창이가 된 자신의 몸보다 부모 걱정부터 했다. A양은 대장과 국부에 심각한 상처를 입어 5시간 대수술을 받았다. 경찰 관계자는 "A양이 피해현장에서부터 이불을 가져가야 한다고 끝까지 챙겼다"며 "A양은 '엄마, 아빠가 내가 없어진 줄 알면 걱정한다. 내가 덮고 자는 이불이 비에 젖은 걸 알면 야단 맞는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A양의 어른스러운 모습과 달리 그의 부모는 A양이 집에서 사라진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C씨는 29일 밤 10시30분쯤 아이들을 재우고 11시쯤 PC방에 갔다가 이튿날 오전 2시30분쯤 집에 돌아왔지만 A양의 실종을 알게 된 것은 오전 7시쯤이었다.
C씨는 "새벽 3시쯤 막내 딸 기저귀를 갈 때 딸이 보이지 않아 안방에서 아빠와 자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딸이 없더라"고 30분 뒤 경찰에 신고했다.
하지만 C씨는 경찰 조사과정에서 "집에 돌아왔을 때 딸이 자고 있었다"고 했다가 "딸이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는 등 진술이 오락가락하고 있다. C씨는 귀가한 뒤에도 게임 동호회원들과 카카오톡으로 문자메시지를 주고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500여명을 현장에 투입해 대대적인 수색을 벌였지만 실종신고 6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집에서 200여m 떨어진 곳에서 A양을 발견할 수 있었다. 결국 A양은 C씨의 품으로 돌아왔지만 어린 딸의 몸과 마음은 이미 상처투성이가 된 뒤였다.
나주=안경호기자 kha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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