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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필의 공간엿보기] <15> 빈소 - 여밈의 의미를 묻고 생각하는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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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필의 공간엿보기] <15> 빈소 - 여밈의 의미를 묻고 생각하는 공간

입력
2012.08.31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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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소는 우리가 옷깃을 여미는 공간이다. 차림을 바루고 자세를 단정히 하는 것은 고인과 유족에 대한 예의이기도 하지만 거기에는 제 마음을 다잡으려는 의미도 스며 있다. 단추를 채우고 옷깃을 펴는 동안 우리는 이별의 슬픔과 상실의 설움을 여민다.

그 여밈은 안으로 가두기 위한 여밈이다. 울부짖듯 흩뜨려지려는 긴 인연의 시간, 그 시간의 기억들을 내면으로 거두어 간직하기 위한 여밈이다. 그것은 군대에서 상급자 앞에 나서는 하급자가, 혹은 호된 질책을 예감하며 어른이나 선생님에게 불려가는 아이의, 내보이기 위한 여밈과 다르다. 절이나 교회처럼 신의 거처로 나아갈 때의 여밈은 관습적인, 교육된 여밈이고, 추울 때 옷깃을 여미는 것은, 정확히 말하자면, 여미는 게 아니라 세우는 것이다. 여밈은 경건한, 정신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여미어진 기억 속에서 우리는 귀한 반추와 자성의 시간을 얻는다. 미처 챙겨보지 못한 미덕을 가려 기리고, 허술했던 제 정성을 반성한다. 그것은 두려운 일이다. 스스로를 비루하게 바라보는 자신의 시선을 마주서야 하는 일일 테니까.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이제는 혼자 반구(反求)하며 감당해야 할 고인과의 안타까운 추억이라도 있으면 여밈은, 반성은, 더 힘겨워진다. 그 순간의 여밈은, 자의식 속에서 위선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래서 불효자처럼 오열하고 싶어지고, 실제로, 아이처럼 목놓아 울기도 한다. 여밈이 흐트러지는 그 순간, 우리가 경험하는 것을 카타르시스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조문실은 그렇게 저마다의 사연으로, 각자의 내면이 경건하게 닫히고 또 터지듯 열리는 격렬한 고해소 같은 공간, 정화의 공간이 된다.

옛적 혼례나 초상 돌잔치 등 크고 작은 애경사들은 주로 집 마당에서 치러졌다. 사람이 넘치면 고샅으로도 상이 나가고, 나누는 음식들과 함께 행사는 마을 전체의 행사로 슬금슬금 확산되곤 했다. 넓든 좁든, 그 때의 마당은 그 자체로서 고인을 추억하고 추모하는 너른 공동체의 공간이었다. 마당들이 사라지면서 공간이 간직한 이야기의 켜, 추억의 켜들도 더불어 허물어진 듯하다. 이제 결혼은 예식장에서, 돌잔치는 부페에서, 초상은 종합병원 장례식장이라는 성냥갑처럼 왜소하게 연출된 공간 안에서 치러진다.

그 상실은 어쩔 수 없지만, 죽음의(또 삶의) 공간성이 심하게 훼손된 것만은 분명한 듯하다. 차례를 기다려 마지막 2박3일을 머물게 되는 그 낯선-추억의 공간성이 훼손된- 한시적 거처에서, 죽음의 개별성도 희석되기 마련이니까. 조문객은 육신(관)이 없는 빈소(관을 놓아두는 방)에서, 고인의 체취도 손때도 묻어있지 않은 공간 안의 영정을 바라보며, 다만 그 낯익은 환한 미소를 위안 삼으며 예를 올린다. 어쩌면 우리는 1년 전, 혹은 1년 뒤, 바로 그 공간 그 자리에서 또 누군가의 영정 앞에 절을 하게 될지 모른다. 난데 없는 부고(訃告)처럼, 어지럽게 버무려지는 경험 속에서, 조문의 기억도 공간성을 잃고 이야기의 개별적 맥락을 놓쳐버리곤 한다. 장례식장의 시간의 켜는 맥락으로 쌓이지 못하고 다만 우리의 기억 속에서 어렵사리 나열될 뿐이다. 개성 없이 나열된 그 공간의 배열처럼.

3일장의 첫 날 빈소는 대체로 고적하다. 고인의 신분과 행적, 또 임종과 발상(發喪ㆍ상을 외부에 알리는 일) 시각에 따라 사정은 다를 수 있지만 이 날은 대개 소수의 혈육과 아주 가까운 친지들이 자리를 지킨다. 그럼으로써 사별의 슬픔을 거리낌없이 격정적으로 드러내고 또 확인하는 시간을 갖는다. 첫날의 조문은 사양하는 것이 유족에 대한 예의라 여기는 이들도 있다.

첫날의 고적함은 애도의 질감을 더 촘촘하게 한다. 가까운 이들조차 몰랐던 생애 마지막 순간의 기억들, 투병과 임종의 상황들이 어렵사리 공유되고, 대상 없는 원망과 안타까움이 분노와도 같은 깊은 슬픔과 버무려지곤 한다.

인연은 특별하지만 관계는 소원해진, '탕자(蕩子)'들이 주변의 번다한 시선을 피해 빈소를 찾는 것도 대개 첫날의 늦은 밤일 때다. 묻어둔 사연을 조심스럽게 들추며 유족에게나마 이해와 용서를 구한다. 망자 앞의 눈물만큼 진솔한 것이 있을까. 모두가 죄인일 때(죄인이라고 여길 때) 죄의 질량은 사소해지고, 확연한 유한(有限)의 운명 앞에 구비의 자잘한 상처들은 적당히 만만해진다. 참회는 너그러운 이해의 품에 깃들여 화해의 포옹으로 이어지고, 너무 늦은 화해가 또 서러워 어제까지 외면하던 이들이 서로를 부둥켜 안고 울기도 한다. 설령 용서의 청이 외면되더라도 훗날 화해의 소중한 씨앗은 뿌려둘 수는 있다. 그 곳은 감정의 극단이 넘실대는 곳이지만, 또 그래?한없이 넓어지는 공간이 되기도 한다.

둘째 날 조문소의 풍경은 첫날과 확연히 달라진다. 조문객이 가장 많고, 그만큼 기억의 저변이 공간적으로 확대된다. 학창 시절, 회사 생활 등 이런저런 사회적 활동의 켜들이 들춰지고 회자된다. 무리 지어 술과 음식을 나누며 각자의 기억들을 이야기하고, 옆 테이블의 낯선 조문객들에게서 흘러나오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도 한다. 종당에는 슬픔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들도 더러는 기쁨과 즐거움의 징검돌을 거쳐가므로, 여기저기서 가벼운 웃음이 터져 나오기도 한다. 그렇게 고인의 삶이 객관화하는 동안, 유족들도 서서히 고인의 죽음을 객관화한다. 사위스러워 입밖에 내지 못하던 고인에 대한 원망도 그런 웃음 위에 얹혀 밉지 않게 털어놓게도 되는 것이다. 그 과정은 유족에게 새로운 슬픔의 샘이 되기도 하고, 슬픔을 극복하는 사다리도 된다.

술자리는 다음 날 첫새벽까지 이어지곤 한다. 술판이 화투판이 되고, 순간순간 왁자해지기도 한다. 그 미시적 잔치의 풍경을 원망하는 유족은 드물다. 여민 옷깃이 풀어지는, 그 일상과 다를 바 없는 흐트러짐의 풍경에서, 상실의 외로움을 잠시 부려놓고 허구로나마 위안을 얻는다. 그 위안 위에, 며칠씩 이어져 온 긴장과 격정으로 녹초가 된 몸을 누인다. 그럼으로써 내일을 버티기 위한 힘을 얻는다.

그렇게 조문은 고인에 대한 작별의 인사를 핑계로 남은 이들에게 위로와 격려를 전하는 의식이 된다. 상처를 공유하며 아픔에 공감하는, 인간의 가장 '인간적'인 면모 가운데 하나를 확인할 수 있는 곳이, 귀한 누군가를 잃고 떠나 보내는 그 순간 그 장소라는 사실은 되새겨볼 만한 일이다.

셋째 날은 간단한 제나 예식을 거쳐 발인(發靷)을 한다. 육신이 영구히 집을 떠나는 날. 그 때의 집은 물론, 공간적으로는 장례식장이지만 의미로는 가족과 함께 생활하던 집이고, 학교와 일터, 술자리 잠자리 등등 모든 포괄적 공간을 아울러 상징한다. 한 마디로 그 '집'은 그를 기억하는 모두의 '곁'이다. 우리의 곁을 영구히 떠나는 것이다.

운구 행렬과 함께 우리도 떠난다. 모두가 떠난 빈 장례식장 O호실은 기다리고 있는 다른 누군가를 위해 말끔히 청소된다. 2박3일 동안의 숱한 이야기들도 함께. 장례식장이 일 없이 그 곁에만 가도 슬픈 것은, 그렇게 누군가들이 저버려온 그 숱한 곁들의 공간을 잃고 떠도는 기억과, 아무런 이야기도 품지 못하는 플라스틱 공간의 운명 때문일지 모른다. 또 거기서 우리를 정녕 슬프게 하는 것은 모든 삶의 이야기들의 덧없음을 상징하고 있는 그 공간에 대한 서글픈 자각, 바로 우리 자신의 운명일지 모른다. 우리가 옷깃을 여미는 것은, 모든 덧없는 것들의 상기(想起) 앞에 지레 주눅들지 않기 위한 무의식의 채비일지 모른다.

시인 천양희가 '옷깃을 여미다'라는 짧은 시(비굴하게 굴다/ 정신 차릴 때/ 옷깃을 여민다// 인파에 휩쓸려/ 하늘을 잊을 때/ 옷깃을 여민다// 마음이 헐한 몸에/ 헛것이 덤빌 때/ 옷깃을 여민다// 옷깃을 여미고도/ 우리는/ 별에 갈 수 없다)에서 하려던 말이 저 무의식의 채비와 다르지 않다면, 우리가 옷깃을 여며야 할 때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고 또 잦아야 할 것이다.

최윤필 선임기자 proos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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