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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흰 개' 소수자의 눈으로 본 1960년대 미국…모든 의식이 뒤엉킨 광기의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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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흰 개' 소수자의 눈으로 본 1960년대 미국…모든 의식이 뒤엉킨 광기의 공간이었다

입력
2012.08.31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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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개 / 로맹 가리 지음ㆍ백선희 옮김ㆍ마음산책 발행ㆍ288쪽ㆍ1만2,000원.

단편집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로 알려진 프랑스 작가 로맹 가리(1914~1980)는 1970년 자전소설을 발표한다. 작가 자신과 아내이자 영화배우 진 세버그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 소설의 배경은 1968년. 미국에서 베트남 반전 시위가 한창인 가운데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암살되면서 인종 갈등이 고조되고, 파리에서는 68혁명이 일어난다. 프랑스에서 살던 두 사람이 진의 할리우드 활동을 계기로 캘리포니아로 터전을 옮기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폭우가 쏟아지던 밤, 두 사람이 키우던 개 샌디가 회색 독일 셰퍼드를 데려오고, 부부는 '바트카'란 이름을 지어주며 새 가족으로 맞이한다. 충직했던 바트카는 수영장을 청소하러 온 흑인 일꾼에게 죽일 듯이 달려들고, 부부는 동물 사육사 잭에게 이 개가 '경찰이 흑인을 체포하는 걸 돕도록 훈련한' '흰 개'(31쪽)중 한 마리였다는 사실을 듣게 된다. 예전 달아난 노예들을 뒤쫓기 위해 훈련시킨 흰 개는 이제 흑인 시위자들을 쫓기 위해 훈련되고 있는 경찰견이다. 흰 개가 보여준 '본성 속에 웅크리고 있던 원초적 폭력성'(21쪽)이 기실 인간의 인종주의에서 비롯된 것임을 간파한 작가는 바트카를 재훈련시키기로 마음먹는다. 잭의 조수이자 흑인인 키스가 이 훈련을 맡게 된다. 학대에 가까운 훈련이 계속되고 바트카는 키스를 비롯한 몇몇 흑인에게 복종하기 시작한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흰 개'가 상징하는 1960년대 서구의 인종주의와 인종주의가 자극하는 인간의 죄의식과 복수의식, 다시 이 의식들이 만드는 온갖 이념들을 고발한다. 미국에서 노예제도가 폐지된 지 100여 년이 지난 1960년 대, 인종주의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더 복잡다단한 모습으로 변했다. 이제 인종주의는 단순히 흑인의 사회적 차별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흑인이 공공연하게 사회적 차별을 받는다는 암묵적 동의 아래에서, 백인이 흑인에 대해 갖는 집합적 유죄의식과 흑인이 백인에 대해 갖는 집합적 피해의식으로 발전한다. 그리하여 1968년 미국에서 인종주의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모호해진 가치 판단의 문제가 된다.

흑인 인권운동에 깊이 관여하는 아내 진 세버그가 백인의 집단적 유죄의식의 상징이라면, 그녀의 집을 뻔질나게 드나드는 흑인인권 운동가들은 집합적 피해의식을 표상하는 인물들이다. 하얀 피부로 흑인 인권 운동을 지원하는 여배우는 백인의 멸시와 흑인의 농간에 휘둘리면서도 순수한 선의를 놓지 못하고, FBI는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 시작한다.

'(흑인) 행동주의자들의 신조는 그들을 지지하는 백인을 이용하면서도 그들이 적임을 결코 잊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백인 속이기'라고 불렀다.'(172쪽)

'독일인들에게 히틀러의 범죄를 잊을 권리가 없듯이 우리에게도 우리 조상이 흑인에게 한 짓을 잊을 권리가 없어. 우리는 반인륜적 범죄를 저질렀고, 그것이 오늘날 일부 흑인이 지극히 소심한 과격행동을 낳는 거야.'(185쪽)

작가는 이 죄의식과 피해의식에 대한 사람들의 공감이 인종의 용광로 미국에 '잘 동화되었다고 느끼게 해주는 환상'(186쪽)을 심어준다고 지적하며 아내에게 인간을 피부색이 아니라 개별적 인간 그 자체로 대하라고 말한다.

바트카의 변화와 인종갈등을 둘러싼 유명인사들의 일화가 교차하는 가운데, 흰 개는 검은 개로 재훈련되어 이제 로맹 가리를 물어 뜯는다. 42년이 지난 지금에서는 진부한 반전으로 읽히지만, 작가는 이 장면을 통해 이것이 '소설'이라는 것과 <흰 개> 의 주인공 로맹 가리는 소설 속 인물이라는 걸 강조하고 싶었던 듯하다.

부부는 1968년 가을 이혼한다. 소설과 현실 모두에서 벌어진 일이다. 사실과 허구, 작가의 예민한 사유가 밀도 높은 문장으로 빚어진 소설은 로맹 가리의 이름값을 하는 작품이다. 이번에 한국어로 처음 번역, 출간됐다.

이윤주기자 mis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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