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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크레타에서 강남 스타일을 생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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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크레타에서 강남 스타일을 생각함

입력
2012.08.30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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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타에 열흘 정도 머물면서,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창조한 소설 속 인물 '그리스인 조르바'를 내내 찾아다녔다. 조르바스러운 그리스 남자를 목격하고 싶었다. 조르바는 그 어떤 지식인보다 더 현자이며 그 어떤 로맨티스트보다 더 다감하며 그 어떤 리얼리스트보다 더 정확하게 세상과 사람을 꿰뚫고 살아가는 인물이었다. 투박하지만 정교한 사상이 머리에서가 아니라 심장에서 발현되는 남자, 를 읽은 사람이라면 누군들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인물. 전통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다는 산골 마을 두어 군데를 찾아갔을 때, 나는 저절로 카메라를 들고 셔터를 눌러댔다. 검은 두건과 검은 셔츠를 입은 투박한 노인들이 노천 카페에 앉아 차가운 맥주를 마시는 저녁 무렵, 적어도 내 눈엔 그 순간 그 자리에 있는 모든 노인들이 '조르바'스러운 사람으로 비쳐졌다. 말투와 제스처가 마초스러운 것은 물론이고, 이방인인 나에게 더할 나위 없는 다정함을 보이기까지 했으니, 조르바 스타일을 찾아낸 것만 같았다.

터키를 돌아다닐 때는 오스만 전통 가옥을 간직한 장소에서 하룻밤 정도 머물고 싶었고, 이슬람의 전통을 고스란히 따르는 현지인들을 만날 때에 눈이 반짝거렸다. 그리스에선 정교회신자다운 정통 복식으로 빨래를 너는 아낙에게 눈길이 갔다. 나는 어디에 있던 간에, 그 장소의 전통을 그래도 반영한 '스타일'을 좇아다녔던 셈이다. 무엇이 어떤 장소의 특정한 스타일이라고 누가 가르쳐준 적은 없어도 우리는 어떤 장소에 대한 어떤 스타일을 저절로 합의하고 사는 듯하다.

여행지에서 만난 한국 사람들끼리 어울려 다니면, 호객꾼들은 번번이 '차이니스? 재패니스?' 하고 묻는다. 일행 중 한 사람이 말했다. '차이니스?'라고 물으면 기분이 나쁘고 '재패니스?'라고 물으면 기분이 좋다고. 누군가는 호들갑스럽게 맞장구를 쳤지만, 맞장구를 치지 않고 조용히 웃던 다른 사람들도 심정적으로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을 것이다. 나의 스타일이 중국스러운 것은 촌스러운 것이고 일본스러운 것은 세련된 것이라는 편견을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듯했다.

'강남 스타일'이라는 노래가 꽤 인기몰이를 하는 모양이다. 이미 오래전에 나왔을 것만 같은 낯익고 익숙해진 낱말을 제목으로 붙인 이 노래를 몇 번 들어보았다. 처음 듣는 노래인데도 너무나 친숙하고 오락성밖에 표방한 게 없는 듯한데도 풍자적이라는 느낌을 풍겼다. 낯익음과 오락성을 전면에 내세우면서도, 낯섦과 풍자성은 냄새만 풍기고 마는 전략이 담겨 있달까. 이 노래는 B급 하위 문화의 기술적 코드만을 A급 주류 문화가 '도용한 사례'에 속한다. 앨범과 뮤직비디오를 보면 더 그런 혐의가 짙다. B급 하위 문화가 가진 정서와 태도는 취하지 않고 그 기술적 코드만을 취했기 때문이다. 그럴싸한 흉내에 불과하지만, 우리는 어쩌면 하위 문화의 진짜 정신보다는 이 그럴싸한 흉내만을 진정 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강남은 전통이 부재하는 장소였다. 수도 서울에서 강남이 어떤 역할을 차지한 건 역사가 짧고, 강남이라는 장소에는 역사성이 없다. 그곳은 부동산 자본가들에 의해 일궈진 장소이고 오직 '부'를 좇는 자들이 입성해서 이룬 신흥 서울이다. 그러니까 강남 스타일은 전통과 사상 같은 것은 완전히 부재하는 텅빈 장소인 셈이다. 어떤 면에선, 강남 스타일이 전통과 사상으로부터 완전히 배제돼 있다는 점 때문에 매력적이긴 하다. 하루키의 소설에서 맛볼 수 있었던 무국적과 공허의 반복이 어떤 면에선 매력적이었던 것과 비슷하달까. 주인공은 어딘가 국적불명이며, 하루에 한 끼는 파스타를 먹고, 집요하게 추구하는 것은 있으나 집요의 이유가 공허함을 망각하기 위한 것에 있고, 끝내는 공허와 정면으로 직면하게 되지만, 그 직면에 대해 쿨한 반응을 보이며, 또 다시 여전할 하루를 시작하고 파스타를 먹고 팝음악을 듣는. 너무나 정직한 하나의 삶이지만 삶이라고 부르기에는 사람냄새가 부재하는. 그래서 삶이라고 부를 수도 없고 삶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김소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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