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 수확할 게 하나도 없어요."
29일 오후 1시30분쯤 전남 나주시 노안면의 한 과수원. 땅(1만9,800㎡)에 떨어진 배를 치우지도 않고 멍하니 바라보던 김성보(44)씨 얼굴엔 수심이 가득했다. "배를 한 번 보시오. 얼마나 (때깔이) 좋소. 이 정도면 개당 3,000~4,000원은 받는 디, 세상에 90% 이상이 떨어져 브렀소." 김씨는 "재해보험은 들었지만 보상은 5분의 1도 못 받는 게 현실"이라며 "이젠 입에 풀칠할 일이 걱정"이라고 하소연했다.
제15호 태풍 볼라벤이 남긴 후폭풍이 만만찮다.
기록적인 강풍을 동반한 볼라벤이 농작물과 양식어장에 큰 상처를 남기면서 추석 대목을 앞두고 '농수산물 대란'이 예견되는 전조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볼라벤이 할퀴고 간 전남 여수와 나주, 충남 예산 등 전국의 들녘과 바다는 멍든 농심(農心)과 어심(魚心)에서 터져 나오는 한숨으로 가득했다.
국내 배 주산지인 전남 나주지역 과수원의 피해 현장은 처참했다. 과수원마다 '바람 폭탄'을 맞아 나무에 달려 있던 배의 10개 중 6~9개가 떨어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실제 나주배 재배면적 2,391㏊(2,570개 농가) 중 60% 이상이 낙과 피해를 입었다. 이로 인해 매년 5만여 톤에 이르던 나주배 생산량은 절반 수준으로 줄어들 전망이다.
사과 주산지인 충남 예산 역시 최악의 상황이다. 전체 사과재배 면적 1,217㏊ 중 97%인 1,182㏊가 피해를 입었고, 평균 낙과율이 무려 70%에 달했다. 예산군 오가면에서 1㏊의 과수원을 갖고 있는 박용신(35)씨는 "60% 이상 낙과피해를 본데다 그나마 매달려 있는 사과도 나뭇가지와 과일끼리 부딪혀 상품가치가 크게 떨어졌다"고 말했다.
전남 해남과 무안, 진도, 논산, 부여 등 나머지 지역에서도 멜론 등 과일은 물론 고추ㆍ오이ㆍ콩ㆍ토마토 등 채소류에 인삼까지 막대한 강풍 피해를 봤다.
전남 완도 일대 전복 가두리 양식장 피해는 거의 재앙 수준이다. 이날 날이 밝자 잰 걸음으로 가두리양식장에 나온 최성완(52ㆍ완도읍)씨는 태풍에 부서져 널브러진 가두리 그물과 칸을 치우다 말고 연방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추석 대목에 출하할 전복 180만 마리가 모두 수장됐다"며 "올해 전복 농사는 끝장"이라고 말했다. 이날 현재까지 전복 주산지인 완도에서만 가두리 양식장 1만5,860칸이 파손돼 전복 2,892만 5,000여 마리가 폐사한 것으로 집계됐지만 본격적인 현장조사가 이뤄지면 피해는 눈덩이처럼 불어날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북상중인 태풍 덴빈이 서ㆍ남해안을 또 덮칠 예정인데다 여수 해역에서는 대규모의 고수온 저염분 수괴(물덩어리)가 완도 해역을 향해 밀려들고 있어 어민들은 망연자실해 하고 있다.
지난 22일 광양항 앞바다에서 처음 발생한 저염분 수괴는 현재 여수시 삼산면 초도 앞바다까지 길이 80㎞, 폭 3~4㎞, 두께 2~3m 크기의 거대한 띠 형태로 이뤄져 있다. 이 수괴는 염분 농도가 17~20‰(퍼밀ㆍ1,000분의 1)로 평년(28~30‰)보다 매우 낮아 큰 피해가 우려된다. 해수 염분 농도는 28‰ 이하일 때 일부 수산 생물에 생리장애를 일으키며, 25‰ 이하로 떨어지면 전복 등 어패류가 폐사한다.
전남도해양수산과학원 관계자는 "태풍 덴빈이 집중호우를 뿌릴 것으로 예측돼 저염분 현상이 더욱 심화할 것"이라며 양식어민들의 대책마련을 당부했다.
농작물 피해로 벌써부터 가격이 치솟고 있는 가운데 유통업체들은 추석물량 확보에 비상이 걸렸다. 광주지역 백화점 등은 나주배 피해가 극심해 당초 예정물량 확보가 어려워지자 공급처를 타 지역으로 돌리는 등 대책 마련에 고심하고 있다.
안경호기자 khan@hk.co.kr
이준호기자 junhol@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