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피임약은 의사 처방을 받도록 하고, 사후(긴급)피임약은 약국에서 구입할 수 있도록 의약품 분류를 바꾸겠다고 한 정부가 관련 단체의 반발로 두 달 만에 이를 철회했다. 과학적 근거를 무시한 채 입장을 뒤집은 정부에 대해 비판이 일고 있다.
보건복지부와 식품의약품안전청은 29일 "중앙약사심의위원회(중앙약심)에서 현행 분류체계대로 사전피임약은 약국에서 구입할 수 있는 일반의약품, 사후피임약은 의사 처방을 받아야 하는 전문의약품으로 유지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단, 장기 복용 시 부작용이 우려되는 사전피임약은 약국에서 구입자에게 반드시 복약안내서를 제공하고, 급하게 필요하지만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을 받아온 긴급피임약은 심야(밤 10시~다음날 오전 6시)나 휴일에 응급실에서 살 수 있도록 보완책을 내놓았다. 또 앞으로 3년간 피임약의 사용실태와 부작용을 집중적으로 모니터링해 분류체계를 재검토할 방침이다.
지난 6월 재분류안을 발표할 당시만 해도 식약청은 "사전피임약는 여성 호르몬 수치에 영향을 미치고 혈전증 등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지만 사후피임약은 부작용이 거의 없다"며 재분류의 타당성을 주장했다. 국제적으로도 사전피임약은 전문약, 사후피임약은 일반약 분류가 일반적이다.
그런데도 과학적 근거에 반대되는 결론을 낸 것은 복지부가 이해가 엇갈리는 단체들을 설득하지 못하고 눈치를 본 끝에 재분류를 포기한 것으로 여겨진다. 의사들과 종교계는 두 피임약 모두 전문약(의사), 약사들과 여성단체는 둘 다 일반약(약사) 분류를 주장해왔다. 복지부 관계자는 "과학적으로는 당초 재분류안이 맞지만 단체들 간 의견이 완전히 갈려 판단하기 어려웠다"며 "피임약은 그 동안의 사용관행, 사회ㆍ문화적인 배경도 중요한 만큼 현행대로 유지키로 했다"고 말했다.
오락가락하는 정책 결정에 여성들은 혼란스러워하며 복지부를 비판했다. 회사원 김모씨는 "사전피임약이 뇌졸중 등 부작용이 있어 전문약으로 바뀐다고 들었는데 이제와 일반약으로 남는다는 건 '부작용이 심한 약품이지만 알아서 조심하고 약국에서 사 먹어라'라는 말로밖에 안 들린다"며 "잔뜩 겁을 주고선 너무 무책임하다"고 말했다.
남은경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사회정책팀장은 "복지부가 41년간 일반약으로 복용해온 사전피임약을 급하게 전문약으로 재분류하는 게 무리라고 판단해 일반약으로 유지하려고 했지만 긴급피임약까지 일반약으로 전환하면 산부인과의사들의 반발이 거셀 것 같아 결국 둘 다 전환하지 않는 무책임한 결정을 내린 것 같다"고 말했다.
중앙약심은 이날 총 504개 의약품을 재분류했다. 어린이 키미테, 우루사정200㎎, 클린다마이신외용액제(여드름치료제) 등 일반약 262개는 처방이 필요한 전문약으로, 잔탁정75㎎ 등 전문약 200개는 일반약으로 분류를 바꾸고, 히알루론산나트륨 0.1%, 0.18%(인공눈물) 등은 효능 효과에 따라 병의원 처방 또는 약국에서 동시에 살 수 있도록 했다.
남보라기자 rarara@hk.co.kr
정승임기자 chon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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