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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민란의 진원지, 진주를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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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민란의 진원지, 진주를 가다

입력
2012.08.29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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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인 1862년 한 해에만 전국 71곳에서 농민들이 난을 일으켰다. 민란은 경남 진주에서 시작해 전라도, 충청도로 삽시간에 번졌다. 유독 1862년에 이토록 많은 민란이 일어난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시작은 왜 진주였을까. '역사스페셜'은 진주농민항쟁 150주년을 맞아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본다.

진주농민항쟁 1년 전 경상우병사 백낙신이 진주로 부임한다. 그는 이미 여러 차례 비리를 저질러 파면을 당했던 인물로 진주에서 패악의 정점을 찍는다. 농민들은 수 차례 조정에 고통을 호소했으나 개선의 기미가 보이지 않자 무력봉기에 나섰다. 봉기에는 양반들도 동참했다. 극에 달한 학정은 강직한 선비집안 출신인 류계춘, 홍문관 교리 출신인 이명윤까지 무기를 들게 만들었다. 지배질서의 중심세력이었던 양반들이 농민시위대에 합류한 것은 조선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탐관오리의 학정이 유독 진주에만 있었을 리 없다. 봉기는 들불처럼 전국으로 번졌다.

당시 지배층과 지식인들은 민란을 수습하기 위해 삼정(전세, 군포, 환곡 등 세금) 운영의 개혁안을 내놓는다. 국가의 주요 수입원으로 기존 봉건제도의 근간을 이뤘던 세금제도를 바꿈으로써 진주농민항쟁은 새로운 시대를 앞당기는 기폭제가 된 것이다. 이처럼 진주농민항쟁은 부패한 조선 사회에 경종을 울렸지만 주모자들은 역적이 됐고, 그 후손들은 역적의 후예라는 굴레를 쓰고 살아야 했다. 150주년을 맞아 기념탑 건립과 위령제가 열리면서 그들의 위상을 재조명하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허정헌기자 xscop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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