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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묻지마 범죄를 키우는 사회

입력
2012.08.28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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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죽으려니 억울한 생각이 들어 그들에게 복수하려 했다."

지난 22일 저녁 서울 여의도 한복판 길거리에서 전 직장 동료들과 길 가던 무고한 시민들에게 칼을 휘둘러 4명에게 부상을 입힌 30세 범인의 말이다.

"세상이 싫어졌다. 누구를 죽이든 상관없었다."

2008년 6월8일 일본 도쿄 한복판 아키하바라 길거리에서 시민과 경찰에게 무차별적으로 칼을 휘둘러 7명이 숨지고 10명이 부상 당한 이른바 '아키하바라 살인 사건'의 범인 가토 도모히로(당시 26세)가 한 말이다.

이들의 말에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스스로를 세상에서 소외되거나 버림받은 억울한 존재라고 느끼고 있으며, 그런 세상이 싫기 때문에, 거기 살고 있는 누구라도 죽여서 복수하고 싶다는 섬뜩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른바 묻지마 범죄, 무차별 범죄를 저지른 자들의 심리다.

8월 중순 이후에만 의정부, 수원, 서울 등지에서 잇달아 묻지마 범죄가 발생하면서 그 원인 분석과 대책에 대한 논의가 무성하다. 증오범죄, 절망살인, 자포자기범죄 같은 용어들이 동원됐다. 한국 사회도 이제는 미국 일본 등 자본주의 선진국에서 정형화되다시피 한 묻지마 범죄의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사실이 현실화된 셈이다.

작가들은 이런 사회적 현상에 유난히 민감한 촉수를 가지고 있다. 2004년 국내에 번역됐던 일본 작가 이시다 이라의 소설 가 생각난다. 작가는 한국어판 서문에 이렇게 쓰고 있다.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보통 사람이, 거부할 수 없는 시대의 압력 속에서, 뻔히 눈 앞에 보이는 절벽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밀려나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이 소설집에는 저마다 '라스트'를 제목으로 단 7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각각의 이야기는 아키하바라 살인 사건보다 10여년 앞서 이미 1990년대 중반부터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 같은 용어가 생겨나며 사회적 관계망이 붕괴하기 시작한 일본사회의 벼랑 끝 인생들을 다룬 것이다. 사채를 썼다 갚지 못하자 부인과 딸을 팔거나 자살해서 생명보험금으로 가족이나 살리라는 협박을 당하는 자영업자, 아파트 대출금을 갚기 위해 몸을 파는 가정주부, 이자를 갚기 위해 피를 팔아야 하는 노인 등등. 이시다 이라는 이를 통해 '모든 시스템을 경제성장이라는 지상목표에 맞추어, 수많은 개인이 쓸모없는 군살로 정리되어 떨어져 나가는' 일본 사회를 비판하고 있다.

우리 사회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의정부, 수원, 서울 사건의 범인은 공교롭게 모두 30대로 무직 혹은 일용직으로 혼자 생활해 온 것으로 조사됐다. 가족, 사회와의 관계망은 단절돼 있었다. 그들은 세상에 대한 절망과 증오를 먹고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의도 흉기난동 사건의 범인이 살았던 곳은 고시원이다. IMF 사태 이후 한국 사회의 한 상징이 된 것이 바로 고시원이다. '고시원'이란 말은 아직까지 국어사전에도 백과사전에도 등재돼 있지 않지만, 우리 사회의 그늘을 한마디로 드러내는 용어다. 사회적 약자와 소외계층, 외국인노동자들이 오직 생존을 위해 그곳에 거주한다. 그 실상과 '고시'라는 말의 괴리가 그만큼 끔찍한 용어도 드물다.

한 시인은 고시원을 이렇게 시로 썼다. "이 선원의 선승들은 하늘과 땅 사이에서 오직 혼자이지요/ 서로 간섭하지 않는 습관들이 미덕이 되어/ 나와 직접 관계되지 않은 일에는 끼어들지 않습니다/ 괜찮아요 불이 나도 어차피 열반에 들면/ 누구에게도 방해되지 않을 테니까요"(차창룡의 시 '고시원은 괜찮아요'에서). 그곳에서 홀로 죽어간다 해도 어느 누구도 뒤돌아보지 않는, 소외계층의 현실에 대한 신랄한 풍자다.

범죄를 사회의 탓만으로 돌릴 수는 없다. 분명히 개인적 요인도 존재한다. 하지만 최근 잇달아 발생한 묻지마 범죄를 놓고 이름을 밝히기를 꺼린 한 검찰 고위 인사가 한 말은 새겨봐야 할 것 같다. 그는 적극적 복지만이 무차별 범죄를 막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일반 국민은 범죄자에게 무슨 복지냐고 말하지만 이들에게 일자리와 숙식을 해결해 주는 것이 가장 시급한 문제"라며 "이들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할 경우 더 큰 사회적 비용을 쏟아 부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종오 부국장 겸 사회부장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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