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 서해안을 할퀴고 간 제15호 태풍 볼라벤의 강풍은 예상대로 위력적이었다. 이날 새벽 한때 광주 무등산 장불재(해발 912㎙)에서 초속 59.5㎙의 순간풍속을 기록하며 가로수와 전봇대를 뿌리째 뽑아낼 정도로 그 기세는 무서웠다. 다행히 폭우를 동반하지 않은 데다 시속 40~50㎞의 빠른 속도로 서해를 빠져나가면서 피해는 예상만큼 크지 않았다.
그러나 볼라벤의 만만찮은 '힘'을 유지한 여풍(餘風)이 하루 종일 도심은 물론 섬 지역에까지 정전사태와 각종 시설물 파손 등을 몰고 와 전국 곳곳에 생채기를 냈다.
◆전국 강풍피해 속출
이번 재해의 특징은 유달리 강풍으로 인한 피해가 많았다는 점이다. 이날 새벽부터 오전 사이 서남해안지방에 상당량의 비를 뿌린 볼라벤이 서해안으로 북상하면서 비를 감추고 바람을 키웠기 때문이다.
이날 낮 12시13분쯤 광주 서구 유덕동 한 교회에서 5층 높이의 종탑 벽돌 일부가 강풍에 무너지면서 인근 주택을 덮쳐 안방에 있던 임모(89)할머니가 숨졌다. 비슷한 시각, 충남 서천에서는 주택 옥상에서 고추 건조기에 비닐을 씌우던 정모(73) 할머니가 강한 바람에 밀려 4m 아래 바닥으로 추락해 숨졌다. 앞서 오전 11시10분쯤 전북 완주군 삼례읍 W아파트 주차장에서 이 아파트 경비원 박모(48)씨가 강풍에 날린 컨테이너 박스에 깔려 숨졌다. 전국적으로 도심 간판이 떨어져 행인 수십여 명이 부상을 입어 인명 피해는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강풍의 영향으로 KTX 등 열차가 멈춰서고 전국 10개 해상교량에선 차량통행이 통제되기도 했다. 코레일에 따르면 이날 경부선 경전선 등 모두 4개 노선에서 열차운행이 지연됐다. 특히 오전 6시26분쯤 광주발 순천행 무궁화호 열차가 광주~극랑각 사이를 운행하던 중 강풍에 날아온 지붕 패널이 차체 하부에 끼는 바람에 멈춰서 44분간 지연 운행됐다. 경남 사천시 신수도 앞바다에서는 7만7,458톤급 석탄운반선이 강풍과 파도에 좌초돼 두 동강이 났지만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다.
◆176만 가구 정전에 통신두절 사태
정전사고도 속출했다. 이날 오전 7시30분부터 3시간 동안 전남 진도 전역에 대규모 '블랙아웃' 정전사태가 발생하고, 광주ㆍ전남지역 70만여 가구에 전기 공급이 끊기는 등 전국적으로 176만 가구가 정전으로 고생했다. 특히 여수산단에서는 오전 6시55분쯤 1~2초 정도 순간정전이 발생하면서 LG화학과 금호석유화학 등 15개 석유화학공장이 한때 가동이 중단되는 피해를 입었다. 또 전남 신안군 가거도 등 전국의 이동통신 무선기지국 수십 곳에서 전력 공급이 끊기고 전송로가 단선되면서 통신두절 사태가 빚어졌다.
◆추석 대목 앞둔 농어민 망연자실
농작물도 강풍을 피해가지는 못했다. 아직 최종 집계가 이뤄지지 않았지만 나주와 순천 등 전남지역 과수원 2,617㏊ 등 전국적으로 수만 ㏊에서 낙과피해와 농경지 피해가 발생했다. 또 볼라벤이 최근 적조피해를 입은 전남 완도와 여수 등 남해안 일대 양식장을 강타하면서 최악의 양식 피해가 우려된다. 완도읍에서만 전복 가두리 양식장 35㏊가 초토화해 추석 대목을 앞둔 어민들을 좌절케 했다. 충남 보은에서는 천연기념물인 정이품송의 가지 1개 4.5㎙ 가량 부러졌고, 역시 천연기념물인 괴산의 왕소나무는 강풍에 맥없이 뿌리가 뽑혀 쓰러졌다.
◆스치듯 지나간 수도권
이처럼 볼라벤이 서해안 지역에 남긴 상처는 상당했지만, 2,000만 시민이 거주하는 서울 등 수도권은 일부 지역의 정전과 가로수가 뽑힌 경우를 빼고는 피해가 미미했다. 볼라벤이 고위도로 북상하면서 힘을 잃은 까닭도 있지만 2010년 수도권을 강타한 태풍 곤파스의 학습효과로 시민들이 적극적인 피해 예방에 나섰기 때문이다. 실제 강풍 피해를 막기 위해 창문에 젖은 신문지나 테이프를 붙여 놓은 시내 아파트들이 많았고, 일부 동네 상점 등에는 테이프가 동이 나기도 했다. 태풍이 근접한 오후 1시 이후엔 시민들이 외출을 자제해 광화문 일대에는 한때 사람 구경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적막했다. 직장인 김경로(29)씨는 "인터넷과 SNS,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이런 방법이 실제 효과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27일 밤 테이프를 창문에 붙여두는 등 피해를 입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고 말했다.
안경호기자 khan@hk.co.kr
전국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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