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민주통합당 대통령후보의 경선이 시작되기 전에 한 후보가 모병제의 실시를 공약으로 들고 나왔다. 세간의 반응은 그에 대한 지지도만큼이나 시큰둥했다. 전혀 현실성 없는 '튀는' 발언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실은 곧바로 '쓰레기통'에 내다 버리기에는 가볍지 않은 무게가 실린 주제이다. 나라의 탄생 이래 군대는 대한민국 사내의 삶의 본질이 되어왔다.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방의 의무를 진다." 헌법(39조 1항)은 남녀를 구분하지 않지만 법률은 남자에게는 필수, 여자에게는 선택으로 군복무를 부과한다.
군대를 다녀왔든, 면제받았든 모든 사내는 피해자다. 군을 면제받은 사내는 평생토록 은근한 멸시의 눈초리를 각오해야만 한다. 술자리의 방담도 주도할 수 없다. 군복무로 인한 사회와의 단절은 일생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끌려온' 사병의 경우는 더욱더 그러하다. "누구든지 병역의무의 이행으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아니한다."이들에게 헌법(39조2항) 조문의 위로는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하다. 나라를 위해 개인의 행복과 자유를 희생하는 것이 군복무의 본질이라고 느낄 뿐이다. 군복무자에게 가산점을 주는 국가공무원시험제도를 여성에 대한 차별로 선언한 우리의 헌법재판소였다. 돈과 권력, 둘 중 하나만 있으면 군복무가 면제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니 대통령도 국무총리도 군면제자라야 가능하다는 독설이 공공연히 나돌 법도 하다.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대한민국 자체의 화두가 군대라며 우리 사회의 근본문제를 제기해 왔다. 어쨌든 군복무의 본질에 대한 발상의 전환이 절실하게 요청되는 시기가 우리 사회에 도래한지 오래다. 우리나라의 일상적 삶은 선진자유국의 수준을 넘어선지 오래다. 그런데도 군복무문제만은 요지부동이다. 거의 모든 나라에서 인정하는 종교적 신념을 이유로 한 대체복무도 완강하게 부정한다.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총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듯 지엄한 원칙에도 중대한 예외가 있다. 국제사회에서도 잘 알려져 있는 '이상한' 제도다. 런던 올림픽을 계기로 더욱더 이 제도가 홍보되었다. '메달을 따면 군대는 빠지고 돈방석에 앉는다.'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곧바로 선진국인의 상식의 소리인 것이다. 국제스포츠 경기는 현대판 전쟁의 성격이 강하다. 마치 중세 유럽의 결투재판처럼 '대표무장'을 통해 국력을 겨루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진정한 스포츠 선진국에는 우리처럼 국가대표 상비군을 두지 않는다. 국민 개개인의 건강과 체력의 총합이 자연스럽게 올림픽에 투영될 뿐이다. 세계 5위를 달성했다고 해서 대한민국은 결코 스포츠 선진국이 아니다. 단지 메달 성취국일 따름이다. 우리의 성과는 국민의 건강이나 체력과는 무관한 대표선수들만의 성과일 뿐이다. 이를테면 모병제의 성공사례라고나 할까. 다른 경우에는 민감하기 짝이 없는 국민정서도 메달리스트들의 군면제에는 잔소리가 전혀 없는 게 참으로 이상하다. 병역이라는 공적의무를 면제받은 이들이 사적기회를 어떻게 활용하는가, 따져볼 법도 한 일인데도 말이다. 런던올림픽이 폐막된 지 보름도 채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벌써 기억이 흐릿하다. 빛나는 성과를 거둔 그 영웅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메달을 딴 사내와 따지 못한 사내는 어떻게 제각기 인생을 설계할까. 짧은 휴식 끝에 다시 선수촌에 감금되는가. 4년 후에 치를 전쟁을 기다리며 전의를 불태우는가. 그동안 군대는 어떻게 할 것인가.
오래전부터 대통령선거 후보자와 자녀의 병역기록이 표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후보자들의 면면을 보아 이번 대통령선거에서는 별반 시빗거리가 되지 않을 것 같다. 그러니 이참에 진지하게 논의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모병제에로의 전환, 대체복무제의 도입, 올림픽 수상자들에 대한 병역 면제의 정당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군사력 축소를 통한 북한과의 평화공존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이루어지기 바란다.
안경환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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