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이란의 테헤란에서 비동맹운동 회의가 열리고 있다. 정회원과 옵저버를 합쳐 전체 유엔 회원국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숫적으로만 보면 대단한 모임이다. 그러나 비동맹권의 영향력은 냉전시대에 비해 현저하게 줄었다. 비동맹운동을 이야기하면서 '제3세계'를 꺼내지 않을 수 없다. 제3세계의 발전 방향을 놓고 열띤 토론을 벌이던 시절이 우리에게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오히려 우리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개도국과 어떠한 협력관계를 맺어야 할지 고민하는 시대가 됐다.
그런데 올해로 '제3세계'라는 말이 나온지 60년이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프랑스의 경제학자이자 인구학자였던 알프레드 소비가 1952년 8월 지에서 '제3세계' (띠에르 몽드)란 신조어를 처음으로 선보였다. 소비는 프랑스혁명으로부터 그 아이디어를 따왔다. 혁명 당시 프랑스 사회는 성직자의 제1신분, 귀족의 제2신분, 평민의 제3신분으로 나뉜 철저한 계급사회였다. 제3신분이 절대다수를 차지했지만 그들의 삶은 비참했다. 소비에 따르면 제3세계는 '무시 받고 착취당하고 경멸의 대상으로 전락했지만, 마치 제3신분이 그러했듯, 중요한 어떤 것이 되고 싶어하는' 존재였다. 그 당시 제3세계로 분류됐던 나라들은 지금도 극소수를 제외하고 경제력과 사회발전 정도의 상대적인 지위에 큰 변화가 없다. 그들을 부르는 호칭만 달라졌을 뿐이다. 개발도상국, 글로벌 사우스, 혹은 '대다수 세계'라고 불리지만 여전히 해외원조에 의존하는 나라들이 많다.
과거 수많은 제3세계 국가들이 경제민족주의 노선을 추구하면서 자립형 발전모델을 지향했다. 서구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지배에 한을 품고 비서구적 산업화의 길, 즉 사회주의형 발전경로를 모색한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그 길은 성공하지 못했다. 게다가 경제지구화 시대를 맞아 채무위기와 대외의존도는 더욱 커졌다. 그렇지만 한국은 달랐다. 제3세계에 속했다가 그 그룹에서 빠져 나온 극소수 나라 중 하나가 됐다. 한국의 '성공' 탓에 제3세계의 일체감이 깨졌다는 평가까지 나오곤 했다. 한국은 분단국가로서의 특수성, 민주주의로의 역동적 이행, 그리고 경제의 특이한 성장패턴으로 인해 기존 유형으로 분류하기 어려운 예외적인 나라가 됐다. 하지만 엄청난 무리가 뒤따랐다. 국제개발론의 대가인 필립 맥마이클은 한국의 경제성장이 제3세계 기준으로 보더라도 '유별나게 탄압이 심한' 상태에서 진행됐다고 비판한다.
한국의 발전을 놓고 국내 진보-보수 진영에서 내리는 평가는 결국 제3세계에 대한 인식에서 갈라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수 측은 우리 현대사를 결과론적으로 평가한다. 목표가 옳았으니 방법이야 어떻든 이만큼 살게 된 게 기적이 아니냐고 소리 높인다. 진보 쪽은 우리 현대사를 그 성격과 과정에 비춰 평가해야 한다고 본다. 내재적으로 취약하고 불평등하고 모순적인 발전의 특징이 우리 사회에 얼마나 악영향을 끼쳤는지 직시하라고 한다. 또한 '묻지마'식 성장이라는 목표 자체가 이제 시대착오라고 말한다. 이런 논란의 중심에 박근혜가 있다. 본인이야 과거를 잊고 미래로 나아가자고 말하고 싶겠지만,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정치적 자산에 힘입어 여당의 대선 후보가 된 마당에 그 유산의 성격을 따지지 않을 수 없다. 어찌 됐건 이번 대선의 핵심은 제3세계 발전사에서 한국이 경험한 예외적인 길을 우리 유권자들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하는 점으로 수렴된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가장 최선의 박근혜식 정치라 하더라도 그 본질은 공리적이고 결과론적인 노스탤지어에 불과하다. 잘 해야 목표는 그대로 둔 채 방법론만 약간 고친, 복고적 정상국가의 확립 정도가 최대치일 것이다. 우리 국민이 자화자찬식 회고의 길을 걸을 것인가, 목표와 과정 모두를 새롭게 짜는 미래지향의 길을 용기 있게 선택할 것인가. 올해의 대통령 선거가 세계사적인 의미를 지니고 전개되고 있음을 똑똑히 인식하는 데서 모든 논의가 출발해야 한다.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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