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올림픽으로 온 나라가 들썩거렸던 1988년은 소설가 박완서(1931~2011)의 생애 중 가장 참혹하고 끔찍한 한 해였다. 폐암을 앓던 남편이 5월 세상을 뜨고 석 달 후 외아들이 사고로 숨졌다. 딸 넷을 낳은 후 어렵게 얻은 아들이었다. 당시 나이 스물 여섯의 서울대병원 레지던트. '청동기처럼 단단하고' 앞길이 구만 리 같던 아들이 갑자기 떠났을 때의 심정을 그는 이렇게 적었다.
"내 아들이 죽었는데도 기차가 달리고 계절이 바뀌고 아이들이 유치원을 가려고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까지는 참아주었지만 88올림픽이 그대로 열린다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을 것 같다. 내 자식이 죽었는데도 고을마다 성화가 도착했다고 잔치를 벌이고 춤들을 추는 것을 어찌 견디랴. 아아 내가 독재자라면 1988년 내내 아무도 웃지 못하게 하련만…미친년 같은 생각을 열정적으로 해 본다."
"참척을 겪은 기막힌 애통과 절망은 당연히 에미의 목숨을 단축시킬 줄 알았다…. 그러나 내 육신은 내 마음과는 별개의 남처럼 끼니때마다 먹고 살고 싶어 하는 게 아닌가. 사람이 짐승과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말씀만& 하소서'에서&)
그리고 1993년 먼저 간 아들을 그리며 낸 자전적 소설이 '나의 가장 나종에 지니인 것은'이다. '날카로운 삼지창 같은 게 가슴 한 가운데를 깊이 훑어 내리는'아픔을 참으며 낳았던 작품이 연극으로 다시 살아났다. 1994년 대학로에서 강부자의 1인극으로 오른 후 18년만이다. 이번엔 손숙의 몫이었다. 단아하고 기품있는 박완서의 글은 폐부를 파고드는 손숙의 절절한 말과 표정으로 살아나 펄떡거리며 관객들의 눈을 적셨다.
"엄마, 해도 너무해. 이제 그만해. 오빠 죽은 지 벌써 7년째야. 딸은 자식 아냐? 엄마가 우리한테 어쩌다 보이는 관심이 뭔 줄 알아? 저 계집들 중 하나를 잃었으면 내가 이렇게 원통하진 않았으련만, 하는 표정으로 우리를 볼 때야. 엄만 우리가 살아 있는 걸 미안해 하게 만들어."
6ㆍ25 당시 비극적 삶을 마친 오빠를 두었던 박완서가 외치고 싶었고, 들었을 법한 절규이다. 연극의 하이라이트는 친구 아들의 문병을 간 자리이다. 하반신 마비에 치매 증세가 있는 아들을 돌보며 사는 친구의 비참한 모습을 보면서 그는 무너지고 만다. 식물처럼 그 자리에 누워 지내는 아들의 수발을 들며 욕하고 구박하는 친구를 지켜본 '박완서'는 그렇게라도 살아있는 아들이 있는 그 친구가 부러워 그 자리에서 땅을 치며 대성통곡을 한다.
"다만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생명의 실체가 그렇게 부럽더라구요. 세상에 어쩌면 그렇게 견딜 수 없는 질투가 다 있을까요? 이제부터 울고 싶을 때 울면서 살 거에요."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은'이라는 제목은 김현승의 시'눈물'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그 역시 어린 아들을 잃은 후 절대자에 귀의하여 슬픔을 극복하면서 쓴 시이다. 그는 아들의 주검을 지켜본 아버지가 무력감을 절감하고 할 수 있는 유일한 것, 그가 절대자 앞에 드릴 수 있는 전부이며 가장 소중한 것은 오직 눈물이라고 했다. 박완서 역시 그 눈물을 통해 '나'를 찾고, 문학으로 돌아온 듯싶다.
전설의 기타리스트 에릭 클랩튼(67)이 부른 명곡 중의 명곡 '천국의 눈물(Tears In Heaven)'은 1991년 뉴욕 고층아파트에서 떨어져 죽은 어린 아들을 기리며 만들고 부른 노래이다. 그는 그러나 얼마 후 이 노래를 부르지도 연주하지도 않겠다고 공언했다. 아들을 잃었을 때 애끊는 심정으로 만들었던 곡을 행복할 때도 불러야 한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손숙씨는 박완서 선생이 살아계셔서 연극을 봤으면 좋았겠다고 했지만 그가 연극을 보려 했을까. 신이 선물한 망각이라는 명약도 자식을 묻은 가슴에는 통하지 않는다. 일에 몰두함으로써 고통을 잠시 잊었을 뿐이다. 참척을 새긴 작품은 눈물의 결정체이며 온몸을 불태우고 마지막 남은 사리이다. 그래서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하는가 보다.
최진환 문화부장 cho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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