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102년 전 오늘 일제가 공작과 강압으로 이룬 '병합조약'이 공포돼 대한제국이 국권을 잃었다. 이후 35년 동안 일제의 식민지 통치가 한반도에 남긴 역사의 상처가 얼마나 깊었는가는 지금까지 한국민의 대일 인식에 남은 역사감정의 응어리에서 확인된다.
상처를 아물릴 기회는 여러 번 있었다.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 '굵은 매듭'만 꼽아도 강제병합 60년(1970년), 해방 50주년(1995년), 해방 60주년(2005년), 강제병합 100년(2010년) 등이다.
이를 전후한 나름대로의 역사 치유 노력은 있었다. 대표적인 게 역대 일본정부의 담화다. 그 가운데 미야자와 기이치 관방장관(82년), 호소카와 모리히로 총리(93년),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93년),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95년), 간 나오토 총리(2010년) 담화 등이 눈에 띈다. 미야자와 담화는 교과서 검정과정에서 이웃나라를 배려하라는 이른바 '근린제국조항'의 근거다. 호소카와 담화는 식민지 지배에 대한 '마음으로부터의 반성과 사과'를 처음으로 담았다. 고노 담화는 군대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군의 책임을 공식 인정했다. 무라야마 담화는 호소카와 담화의 '마음으로부터의 반성과 사과'를 '통절한 반성'과 '진정한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로 더 끌어올렸다.
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이뤄진 간 담화는 무라야마 담화를 그대로 잇고, 미래지향적 한일관계를 위한 인도적 지원책을 덧붙였다. 적어도 무라야마 담화나 간 담화에 이르러서는 '사죄와 반성'이 이뤄졌다고 볼 만했다. 실제로 국내에서도 일부 불만은 제기됐어도 대체로 수용하는 분위기가 조성되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독도문제로 촉발된 외교 갈등에서 일본 정계 지도자들이 드러낸 퇴행적 역사인식에 비추어 왜 지금까지 역사의 상처가 다 아물지 못했는지가 확연하다. 그 동안 일본 정부가 밝힌 '사죄와 반성'이 자발적으로 표시된 진의(眞意)가 아니라 한국측 요구에 마지못해 응한 '허위' 내지 '비(非) 진의'일 가능성이 커졌다. 자민당이 재집권하면 역대 일본 정부 담화를 모두 고치겠다는 아베 신조 전 총리의 외침이 그게 아니고 무얼까. 노다 요시히코 총리가 '정치 돌풍'을 노리는 하시모토 도루 오사카 시장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군대위안부 인식을 드러낸 것은 또 뭔가.
역사 치유의 출발점인 가해자의 진솔한 사과와 반성이 결여하고는 그 이후의 진정한 화해는 애초에 기대하기 어렵다. 퇴행적 인식에 빠져 고립을 더해가는 일본에 102년 전의 두려움과는 정반대로 연민을 느낄 정도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