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현지시간) 오전 9시 워싱턴의 미국 적십자사 이사회의실. 1962년 8월 당시 미국을 처음 방문했던 42개국 젊은이들이 50년 만에 다시 한 자리에 모였다. 미 적십자의 외국학생 방문프로그램(VISTA)에 참가했던 이들은 어느덧 지긋한 할아버지, 할머니가 됐지만 서로를 기억해내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50년 전 열여덟 살의 나이로 VISTA에 참가했던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이날 8개의 테이블을 돌며 친구들 이름을 부르고 악수와 포옹을 나누며 잠시 그때로 돌아갔다. 연단에 선 반 총장은 들뜬 표정으로 "그때 우리 모두는 10대 학생이었다"고 회고하고 "지금 내 심정을 어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감격스러워했다.
그는 이날 연설에서 이념과 명분에 구애 받지 않고 인류 보편 가치를 실현하는 적십자 정신이 자신과 주변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휴먼스토리로 이어갔다. 연설 뒤에는 "작년 한해 700회 이상 연설했지만 이번처럼 무슨 말을 할지 고민한 적이 없었다"며 "가장 감명 깊은 연설이었다"고 스스로 평했다. 이번 만남이 개인적으로 가장 의미있다는 뜻이었다.
반 총장은 50년 전 당시 청년 외교관 역할을 한 일화도 소개했다. 최빈국 한국을 소개하기 위해 모시 한복 차림으로 워싱턴 거리를 활보했고 동료들에게 충북 충주여고생들이 마련해준 복 주머니를 나눠주기도 했다. 그때 만난 재클린 케네디 대통령 부인에게는 흰 고무신과 복 주머니를 함께 선물했다. 반 총장은 "백악관에서 만난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냉전시대에는 화해가 어렵지만 당신들이야말로 미래의 희망'이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감명받았다"며 "열여덟 고등학생이 세계까지는 아니어도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해야겠다, 외교관이 돼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고 회상했다. 그리고는 "37년 외교관 생활 끝에 지금은 유엔 사무총장이 됐으니 무한한 개인적 영광"이라면서 "반세기 전 방미가 계기가 돼 (모든 게) 확 바뀌었다"고 했다. 한국 대표로 반 총장과 함께 VISTA에 참가했던 곽영훈 환경그룹 회장은 "한국의 방미 학생단이 우여곡절 끝에 2명에서 4명으로 늘면서 반 총장이 포함됐다"며 "참으로 운이 좋은 분"이라고 했다. 이날 행사는 힐러리 클린턴 국무부 장관이 취지에 흔쾌히 동의해 미 국무부와 적십자사 등의 주선으로 이뤄졌다.
워싱턴=이태규특파원 tg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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