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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우유주사와 불면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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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우유주사와 불면시대

입력
2012.08.27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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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성이 "언제 우유주사 맞을까"라는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마시는 우유를 주사로 맞다니. 그러나 이 의문의 문자를 받고 그녀는 병원으로 들어가 주사를 맞고 사망을 하고 말았다. 우유주사란 프로포폴이란 마취제를 뜻하는 의사와 그녀사이에 통하는 암호였다. 사실 프로포폴은 전신마취를 하지 않고 환자를 재워서 간단한 수술을 할 때 주로 사용하는 아주 효과적인 약품이다. 마취 유도 시간이 짧고 잘 깨어나 간편하게 쓸 수 있다는 특징이 있어 애용된다. 그런데, 이 약이 몇 년 전부터 음성적으로 짧은 시간에 깊은 수면을 유도하기 위해 사용되기 시작해 작년 2월 식품의약품안전청은 프로포폴을 마약류로 지정 하며 한층 통제를 강화했고, 의존성이 생긴 사람들이 병원에서 절도하다 붙잡히는 사건도 발생하기 시작했다. 신종 마약의 등장인가? 사실 프로포폴은 수면효과만 있는 약이다. 과거 프로포폴 사건은 격무에 시달리는 의료진이 짧은 시간 숙면을 취하기 위해 마취제를 주사하다가 발생했다. 나도 전공의 시절 당직을 하고 난 다음날 빈 시간이 잠깐 나면 구석에 처박혀서 잠을 청하려 했지만 신경만 곤두선 채 잠이 안와 애를 태웠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일반인들에게까지 퍼지게 된 것일까. 처음 이 사건의 피해여성을 포함해, 일부 프로포폴을 남용한 사람들이 유흥업소 종사자로 알려져 환각제를 복용한 것으로 오해를 하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사실은 그들이 간절히 원한 것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시간만큼 깊은 잠을 자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니 제대로 잠을 자며 사는 사람이 드문 것이 현대사회다. 세상은 24시간 쉬지 않고 돌아간다. 편의점은 손님이 없어도 문을 닫지 못하고 불을 밝히고 있어야하고, 김밥집이나 설렁탕집도 밤새 문을 열고 손님을 기다린다. 12시가 되면 애국가가 나오고 나서 먹통이 되던 텔레비젼도 리모콘을 누르다 지칠 정도로 많은 채널이 콘텐츠를 쏟아낸다. 때가 되면 다 같이 자고, 해가 뜨면 일어나는 세상과는 결별한지 오래다. 프로이트는 성숙은 '즉각적 만족'을 지연시키는 능력에서 온다고 했는데, 현대사회는 "원하라, 그러면 얻을 것이다"는 본능을 만족시켜준다. 돈만 내면 언제든지 무엇이든, 내 눈앞에 바로 얻을 수 있는 편리한 세상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인간의 기본적 생리에는 역행하는 일이라는 것. 유흥업소 종사자나 3교대로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도, 세상이 이러하니 누군가는 언제나 깨어있어야만 한다. 최대한 효율적으로 공간과 시간을 활용하기 위해서, 또 살아남기 위해서는 원하지 않는 시간에도 일을 해야한다. 불규칙적인 생활이 반복되면서 수면시간은 항상 모자라다고 느끼는, 수면시간 적자인생이 늘어나게 되었다. 어쩌다 한밤중에 찾아가는 편의점에서 만난 억지로 눈을 뜨고 있는 점원의 쾡한 눈빛은 좀비같아 보인다. 통계를 봐도 최근 5년간 불면증 환자는 84%가 증가했고, 진료비 증가는 연 20%에 달했다는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발표가 일부만의 일이 아님을 뒷받침한다.

잠을 안재우는 고문이 제일 잔인한 방법이라 한다. 현대 사회에서는 살아남기 위해서 야금야금 잠을 빼앗기고 있는 것 같다. 미하엘 엔데는 소설 <모모> 에서 회색일당이 사람들의 시간을 도둑질해서 담배로 말아 피우는 것을 통해 바쁘기만 한 현대사회를 우화적으로 비판했다. 경쟁에서 뒤쳐질 것이라는 불안없이, 누구나 원할 때 충분한 시간에 자고, 쉴 수 있다면 우유주사를 찾을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아무때나 원하는 것이 있으면 돈만 내면 살 수 있다는 현대인의 삶의 방식이 잠의 영역에까지 침범해서, 밀린 잠을 원하는 시간에 푹 깊이 잘 수 있다면 죽음마저도 불사할 수 있다는 뒤틀린 욕망의 처절한 표현이 프로포폴 남용이라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이 사건은 엽기적이고 변태적 탈선이라기보다, 마음대로 잠을 잘 자유마저 빼앗긴 불면의 시대에 필연적으로 생길 수 밖에 없는 비극이다.

하지현 건국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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