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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불행을 가장한 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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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불행을 가장한 축복'

입력
2012.08.27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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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외국 정치학자가 한국 전쟁을 '비탄의 악마, 파괴의 천사'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동족상잔의 전쟁 경험에 대한 단장의 슬픔은 이해하지만 토지개혁 등 일련의 사회경제적 변혁을 통해 전쟁의 폐허 위에서 산업화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남미의 경험과 비교했을 때 구 봉건지주세력이 무너짐으로서 별 저항 없이 전후 수출주도산업화로 신속한 전환이 가능했으며 초기 산업화 과정에서 주요 이익집단의 단견적 이해관계로부터 비교적 자유롭게 장기적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는 연구들도 있다. 일종의 '불행을 가장한 축복'(Blessing In Disguise)이라는 것이다.

비록 축복이었다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소위 'IMF 위기'로 일컫는 1990년대 말 외환위기로부터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까지 우리가 경험한 일련의 경제위기 또한 소중한 학습의 기회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 90년대 말 이후 전개되어 온 신자유주의 국면에서 2008년 이후 파급되고 있는 포스트 신자유주의 국면에 이르기까지 우리 국민들은 신자유주의의 두 얼굴을 또렷이 보았으며 이제 어느 정도 경제적 세계화의 명암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체득하게 된 듯하다. 재벌개혁의 필요성은 십분 인정하지만 해외투기자본에게만 좋은 일을 시켜서도 안 된다는 점을 알고 있다. 양극화 해소와 복지 확충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이지만 재정위기의 위험과 재정확보 방안의 중요성 또한 이해한다. 이번 대선에서 여야 불문하고 경제민주화와 복지를 내세우지만 단순한 구호와 포퓰리즘 만으로는 이길 수 없을 것으로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보다 정치적인 사안들을 보자. 우선 촛불집회의 정치적 학습이다. 2002년 소위 '효순이, 미선이 사건'에 대한 촛불시위로부터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반대 촛불시위 그리고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에 이르기까지 촛불집회는 중요한 정치참여 유형으로 자리 잡았다. 촛불집회에 대한 정치적 해석과 평가는 분분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관심을 끄는 건 5월에 있었던 미국산 소고기 수입중단 촛불시위의 경우 별 동력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번에는 사안의 심각성이 예전 같지 않았다는 점이 작용했겠지만 2008년의 학습을 통해 풍문에 기초한 막연한 불안이 사라졌으며 동시에 이에 편승한 정치적 단체들의 구호 또한 별 호응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부와 정치권에 대한 건전한 감시와 비판을 견지하면서도 과도한 정파적 정치를 지양하는 시민 정치의 긍정적 학습효과로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최근 들어 통합진보당 사태만큼 불행한 정치적 사건은 찾기 힘들 것이다. 이석기, 김재연 의원 징계안이 부결되고 민주노총의 지지 철회와 기존 당원들의 줄탈당이 이어지면서 진보당은 해산 위기에 처해있다. 2008년 민주노동당 분당 사태가 재연되면서 이제 진보 정당 실험의 종말이 온 것은 아닌가 하는 패배주의가 팽배한 듯하다. 하지만 2008년과 달리 이번에는 소위 경기동부연합을 위시한 구당권파의 종북주의와 패권주의의 민낯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2008년 경우 대부분 유권자들은 당내 계파는커녕 민노당과 당시 진보신당의 차이조차 잘 몰랐었을 수 있지만 이번 학습을 통해 향후 진보 정당의 재구성에 있어서는 보다 변별력 있는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해본다.

이제 이번 12월 대선을 앞두고 우리는 그동안 무엇을 배웠는지 곰곰이 생각해봐야 한다. 사실 한국 정치는 많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짧은 기간에 여야가 민주적으로 정권을 교체하는 성공적인 정치적 학습과정을 거쳐 왔으며 지난 두 정권의 경험으로부터 진보와 보수 정부의 극명한 차이를 체험한 바 있다. 시민정치의 부상 또한 정당정치를 개혁으로 이끌 수 있는 동력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현 대선 정국을 바라보면서 우울한 와중에도 '불행을 가장한 축복'을 조심스레 기대해보는 이유다.

김의영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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