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늙은 작가에게 남은 마지막 소리… '여향의 미학' 펼치고 싶다"
지난 24일 오후, 서울 합정역 인근 북카페 '자음과모음'에서 잔치가 벌어졌다. 소설가 황석영의 등단 50주년 기념작으로 한국일보에 연재중인 '여울물 소리' 100회를 기념해 작가와 독자들이 만난 자리이다. 김영찬 계명대 교수의 사회로 열린 이날 행사에서는 소설에 댓글을 단 독자 가운데 20명이 뽑혀 초청됐다.
소설 <개밥바라기 별> 을 인터넷에 연재했던 2008년부터 황씨의 블로그와 출판사 카페에 댓글을 달았던 열혈 독자들을 비롯해 포항, 제주 등지에서 온 20대 대학생들, 휴가를 내고 온 사회 새내기, 백일 된 아들을 안고 온 가족 등 다양한 독자들이 참석했다. 한 독자는 잔치떡을 돌리기도 했다. 황 작가는 독자들의 인터넷 카페 닉네임을 들을 때마다 독자들이 달았던 댓글과 개인사를 언급하며 친근하게 인사했다. 개밥바라기>
김 교수는 "소설 '여울물 소리'는 이야기란 무엇인가란 질문을 던진, 문학사적으로 의미 있는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황 작가는 "등단 50주년에 소설로 작가론을 써보자는 의도로 시작한 작품"이라며 "이야기가 어떻게 형성되는가, 이야기꾼은 어떤 것을 이야기 대상으로 삼는지 등 몇 가지 질문들을 담은 소설"이라고 말문을 열었다.
"처음에는 이야기꾼 이야기를 남미 소설처럼, 역사 배경 없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이야기처럼 쓰려고 했어요. 그런데 가만 보니까 우리나라 독자들은 전통적으로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더라고요. 사실적이고 실감나는 서사를 좋아해요. 그래서 임오군란 대목에서는 너무 깊이 갔어요. 또 한번씩 독자들과 놀고 가기도(이신통이 '장끼전' 등 구술문학을 들려주는 대목) 했고요. 책으로 낼 때는 분량을 좀 줄일 생각입니다."
연옥을 화자로 설정한 이유에 대해서는 "세계문학의 흐름이 바뀌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신통은 물론 주변인들의 태생, 성격과 이들이 겪은 일을 손바닥 보듯 훤하게 꿰뚫고 있는 연옥은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에 근접한 1인칭 관찰자다. 1인칭 화자가 소설 구조 속에 3인칭 화자처럼 읽히는 것은 살만 루슈디의 <한밤의 아이들> , 필립 로스의 <휴먼 스테인> 등 1급 작가의 최신 작품들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휴먼> 한밤의>
작품내용을 비롯해 작가로서 고충, 소설 잘 쓰는 법 등 다양한 독자 질문이 이어졌다. "3부 마지막에 사라진 서일수는 언제 다시 나오냐?"는 질문에 황 작가는 "서일수는 이신통의 멘토로 동학운동가 서장옥을 모델로 삼았다"며 즉답은 피했다. 4부에 등장한 백화의 모델은 판소리 최초의 여류명창 진채선이다.
황작가는 "나는 이 소설을 통해서 '여향(餘香)의 미학'을 펼치고 싶다. 늙은 작가에게 남은 마지막 소리, 그걸 들려줄 생각"이라고 말했다. 제목 '여울물 소리'의 숨은 뜻이다.
이윤주기자 misslee@hk.co.kr
전혼잎 인턴기자 (한양대 국어국문 4년)
■ '여울물 소리' 줄거리
소설 '여울물소리'는 봉건적 신분질서가 동요하고 외세와 신문물이 들이치던 19세기 조선을 배경으로 전기수(傳奇叟) 이신통의 일생을 뒤쫓는 이야기다. 전기수는 당시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서 소설 등을 들려주던 이야기꾼이다. 작품 속 화자는 기생 출신의 주막집 주인 연옥. 주막에 찾아온 신통을 보고 첫눈에 반하지만, 돈 많은 한량 '오 동지'에게 시집갔다 3년 만에 다시 주막으로 돌아와 신통과 인연을 맺는다.
1부 '이신통을 찾아서'에서는 신통이 전국을 떠돌아 다니다 연옥과 인연을 맺은 과정, 다시 연옥을 훌쩍 떠나 연희패와 어울리다 혼자 전기수로 전국을 떠돌아다니는 이신통의 대략적인 상이 펼쳐진다.
2부 '고향에 남은 자취'에서, 연옥은 신통의 누이를 만나 집안의 내력을 듣게 된다. 그의 아버지는 전 풍덕군수의 서자 이지언이다. 할아버지가 본처와의 사이에 아들이 없어 아버지가 집안의 장자 노릇을 했지만, 벼슬길이 막혀 있어 의원으로 만족해야 했다. 신통과 누이는 이지언과 교전비 사이에 태어난 자식으로 신통은 이복형 이준에게 각종 설움을 당하다 과거시험을 본다는 핑계로 22세에 고향을 떠난다. 연옥은 누이에게서 신통이 첫 부인과 사이에 낳은 딸 자선(慈鮮)이 있음을 듣게 된다.
3부 '집을 버리다'에서는 소설의 큰 축인 동학과 증산도의 밑그림이 그려진다. 신통이 한양에서 전기수로 살게 된 사연, 그의 정신적 스승인 서일수를 만난 과정, 별장 김만복을 만나 임오군란을 경험한 내용이 펼쳐진다. 서일수는 조부 때 괘서 사건에 연루돼 집안이 몰락한 양반 집안의 후손으로 스님이 돼 덕산 일대에서 살다 임술난리 때 봉기꾼 임효를 만나 천지도에 입문한다. 임오군란이 발발하자 일수와 신통은 신통이 전기수로 활약하며 사귀게 된 김만복에게 사건의 전개과정을 듣게 된다. 사내로서 의협심으로 동료 군인들의 소요에 앞장섰던 만복은 임오군란 직후 처형 당하고, 서일수는 돌연 사라진다. 신통은 전기수로 밥벌이를 하며 연희패와 섞인다.
4부 '부평초 하얀 꽃'은 그의 또 다른 여인 백화와의 인연을 소개하며 신통의 이야기꾼으로서 면모를 소개한다. 연옥은 신통이 '신백화'와 부부광대로 지낸다는 소식을 듣고 부안으로 떠난다. 서일수가 사라진 뒤 전기수로 애오개 주막에서 혼자 기거했던 신통은 애오개 놀이패의 모갑이 박삼회를 만난다. 박삼회의 연희패에 들게 된 신통은 이야기꾼으로 재능을 다지고, 우여곡절 끝에 백화와 만나 일년 넘게 남도를 돌아다니며 신통이 고수, 백화가 소리를 하며 지낸다.
소설은 기승전결의 갈등 구조를 갖추지 않은 채, 이야기의 꼬리를 물고 한없이 이어진다. 작가는 "각 장을 독립된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읽어도 무방하다"며 "앞으로 남은 이야기를 통해 동학의 사상적 배경을 정리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윤주기자 mis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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