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풀이 본능/데이비드 바래시ㆍ주디스 이브 립턴 지음, 고빛샘 옮김
명랑한지성 발행ㆍ352쪽ㆍ1만8000원
험담과 따돌림 때문에 직장에서 잘렸다고 믿는 실업자가 22일 퇴근길 여의도 한복판에서 칼부림 난동을 일으켰다. 그는 평소 앙심을 품고 있던 예전 직장 상사와 동료뿐 아니라 무고한 행인에게도 흉기를 휘둘러 중태에 빠뜨렸다. 다른 데 취직했지만 적응하지 못해 나오고 신용불량자가 된 그는 복수하고 싶었다고 했다. 자살할 생각도 했으나 혼자 죽기 억울했다고도 했다. 그는 사회에 화풀이를 한 셈이다.
최근 잇따라 벌어진 이 같은 '묻지마 범죄'에 한국 사회는 큰 충격을 받았다. 뚜렷한 이유도 없이, 혹은 도무지 납득하기 힘든 이유로, 무고한 사람들을 마구 해치는 범죄가 일어날 때마다 원인과 대책을 놓고 여론이 들끓는다.
신간 <화풀이 본능> 은 이번 사건을 분석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남편은 진화생물학자, 아내는 정신과의사인 미국인 부부가 함께 쓴 이 책은 폭력성과 공격성의 원인에 대한 진화론적 분석이다. 2011년 나온 원서 제목은 <앙갚음 : 우리는 왜 보복하고 화풀이하고 복수하는가> 이다. 앙갚음> 화풀이>
먼저 용어부터 정리하자. 보복은 즉각적이고 직접적이다. 복수는 나중에 하는 거고 간접적일 수도 있다. 보복과 복수가 가해자를 바로 겨냥하는 것과 달리 화풀이는 엉뚱한 대상에게 퍼붓는 것이다. 이 책의 관심은 화풀이에 집중돼 있다.
저자들은 화풀이는 진화의 오랜 결과로 유전자에 새겨진 본능이라고 말한다. 악당이나 비열한 자만이 하는 행동이 아니라는 소리다. 사람뿐 아니라 동물도 화풀이를 한다. 무리를 지어 생활하는 동물일수록 화풀이 성향이 강한데, 이는 화풀이가 사회적 평판이나 명성, 위계질서나 서열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사회적 충돌에서 밀렸을 때 느끼는 패배감과 모멸감을 씻기 위해 자기보다 약한 개체를 공격함으로써 '나는 호구가 아니다'라고 선언한다는 것이다. 화풀이는 자신의 고통을 남에게 떠넘김으로써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효과가 있다. 그것은 지금 내가 패배했지만, 얕볼 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구경꾼들에게 알리는 행동이다.
화풀이는 개인들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다. 사회나 국가 단위의 집단적 화풀이도 하는 것이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이다. 인간 특유의 집단적 화풀이로 저자들이 지목하는 것에는 폭동, 전쟁, 테러도 포함된다. 예컨대 미국의 이라크 침공도 일종의 화풀이다. 9ㆍ11 테러 이후 미국인들이 느낀 고통과 분노를 그렇게 풀었다는 것이다. 복수할 대상이 필요해서 아무 죄도 없는 이라크를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책은 진화생물학을 바탕으로 화풀이의 원인과 기제를 한참 설명한 뒤, 인간 사회의 역사에서 구체적인 사례를 제시한다. 신화와 문학작품에서 나타나는 복수와 화풀이 성향도 분석한다.
긴 설명 끝에 저자들이 하려는 말은 이렇다. "화풀이는 본능이다. 하지만, 인간은 이 충동을 조절할 수 있다."화풀이 때문에 일어나는 개인적 사회적 비극, 화풀이가 또 다른 화풀이를 부르는 악순환을 막으려면 어떻게 할 것인가도 제안하는데, 처방치고는 매우 허술하다. 여러 종교가 가르치는 용서와 화해를 정리하고 심리적 방법으로 호흡명상 같은 것을 추천하니, 맥이 빠진다.
오미환선임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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