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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정의 사람, 이야기] 양심선언 20년, 회고록 준비 한준수 전 연기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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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정의 사람, 이야기] 양심선언 20년, 회고록 준비 한준수 전 연기군수

입력
2012.08.24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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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정선거 풍토 아직 멀었어… 양심 팔면 나라 망치는 거야"

올해처럼 총선과 대선이 겹쳤던 1992년은 '양심선언의 해'이기도 했다. 제14대 총선 투표일을 이틀 앞둔 3월 22일, 육군 제9사단 소속 이지문 중위는 군 부재자 투표에서 자행된 총체적 부정을 폭로했다. 총선 결과는 민주자유당 149석, 민주당 97석, 통일국민당 31석, 기타 22석. 3당 합당 후 첫 시험을 치른 민자당으로선 야당과 무소속을 합한 150석에 한 석 뒤지는 불안한 승리였다. 이 중위의 파면과 이등병 강등 전역 이후 잊혀지는 듯했던 3ㆍ24 부정선거 논란은 8월 또 다른 양심선언이 터져나오며 대선 정국을 뒤흔들었다.

"지난 14대 총선은 사상 유례없는 관권타락선거였으며, 12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총선체제를 그대로 연계해서 관권개입이 더욱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한준수(당시 61세) 전 충남 연기군수는 8월 31일 국회 민주당 원내총무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총선 당시 관권개입 부정 사례를 폭로했다. 충남지사와 민자당 후보에게서 받은 돈과 군에서 조달한 자금 등 8,500만원이 선거용으로 뿌려졌고, "직을 걸고 여당 후보를 당선시키라"는 윗선의 지시에 따라 읍면은 물론 리 단위까지 조직적인 표 관리가 이뤄졌다는 등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이 일로 치러야 할 혹독한 대가를 모르지 않았던 그는 14쪽에 달하는 육필 양심선언문 말미에 이렇게 적었다. "나 한 사람의 희생으로 공무원 전체의 중립성과 신분이 보장되고, 나아가 이 나라의 참된 민주정치가 실현된다면 당장 이 자리에서 죽는다 해도 두려울 것 없으며, 아무 여한도 없습니다."

그로부터 20년, 그 절절한 바람은 얼마나 실현됐을까. 지난 20일 대전 오류동 자택에서 만난 한 전 군수에게 그 물음부터 건넸다. 망구(望九)의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처럼 (공무원과 행정조직) 다 동원하고 그런 식은 아니지만, 선거 부정이 아주 사라지진 않았지. 자신의 영달을 위해 권력에 아첨하는 공직자들도 있고, 새누리당에서 터진 공천헌금 사건이나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경선 부정도 그렇고…. 사람이라면 양심이란 게 있는 거잖아. 그걸 지키고 살아야지, 그것만이라도…."

-건강은 어떠신가요?

작년 6월에 심근경색이 와서 1주일 입원했어요. 완치는 안돼 왼쪽 팔다리가 좀 불편한데, 기억력은 좋아. 어릴 적부터 옛날 기억은 그대로 다 있지. 아홉 살에 초등학교에 들어갔는데, 일제 때니까 소학교였지, 2학년 담임이었던 일본 선생이 "어느 학자가 인생이 뭔가 평생을 연구했는데 끝내 답을 못 찾고 산에 올라가 바위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얘기를 해 줬어. 그땐 무슨 뜻인지도 몰랐을 텐데,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나.

-어릴 적 굉장히 영특하셨나 봅니다.

2남2녀 중 막내로 났지. 한일합방 전 면장을 지내신 할아버지께서 형님 더러 "동생 잘 가르쳐라, 집안 일으킬 놈 저 놈밖에 없다"고 하셨는데, 형님이 징용을 가는 통에 소학교만 마치고 아버지 농사일 거들었지. 해방되고 돌아온 형님 덕에 이름난 선생들 찾아 다니며 한문 공부를 했어요. 논어, 맹자 공부하면서 내가 좌우명으로 삼은 게 '심청의립(心淸義立)'이여. 마음이 맑으면 의로움이 정립된다는 거지. 군대 갈 나이가 됐는데 사병은 안되겠다 싶어 독립운동 하셨던 친척 어른을 찾아가 사관학교 보내달라 했지. 그 어른 말씀이 "문관으로 출세하라"며 정인보 선생 문하에 넣어줄 테니 그 전에 공부 좀 더하라는 거야. 그렇게 외지 나가 공부하는데 6ㆍ25가 터졌어. 고향 가서 한다고 병적 신고를 미루다 기피자 단속에 걸려버려 지서에 끌려갔지.

-고초를 좀 겪으셨겠네요.

한학 공부한 덕을 좀 봤지. 어디서 그 얘길 들었는지 지서장 특별대우 받고 훈련소 가서도 심사관이 <논어> 를 줄줄 암송하는 걸 듣더니 이력서에 '성균관대 유교학과 3학년 중퇴' 이렇게 써주더라고. HID 첩보대에 배치 받고 3년 6개월간 정보 분석만 하다 제대했어. 그때도 아기똥 만한 정의감 같은 게 있었나 봐. 상사 권유로 교회에 갔는데 매미채(헌금주머니)가 왔다 갔다 하며 돈을 넣으래. 이게 무슨 순수한 거냐고 따지곤 그 뒤로 안 갔지.

-공무원 생활 시작이 좀 늦은 편인데요.

제대 후 보통고시 준비하다 59년 제1회 상급(주사)지방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고 고향인 청양군 읍사무소에서 첫 발을 뗐지. 이듬해 2월 말 군청 행정계에 배치됐는데 투표용지가 잔뜩 든 투표함을 다락방에 넣어놨더라고. 그게 바로 3ㆍ15 부정선거였어. 개표집계를 하는데 합계가 120%야. 이승만 찍은 표를 마구 넣은 거여. 내무부에 보고하니 이승만 95%, 누구 몇 표, 이렇게 불러줘. 법원서 검표 나오면 어쩌냐니까 "새까만 쫄병이…시키는 대로 해" 그래. 이러다 나라가 망하겠다, 딱 그 생각이 들더라고. 그 후로도 4ㆍ19혁명 나고 치른 7ㆍ29 선거 빼고는 죄다 관권ㆍ금권선거였으니, 절대 정권교체가 될 수 없는 거지. 5ㆍ16 이후엔 조폐공사에서 트럭으로 돈을 싣고 날라다 마구 뿌리기도 했어.

-도지사 청탁 거절했다가 잘린 일도 있다면서요.

72년 충남도청 치수과 이수계장 할 때여. 그땐 천지가 부정이었지. 하천 공사를 입찰로 발주했더니, 지사가 자기 동창 안 챙겨줬다고 모가지를 자르더라고. 행정소송 내서 이기고 다음해 복직했는데, 후임 도지사가 "저 놈, 촌으로 내쫓으라"고 했다네.

-그 일로 미운 털 박혀 승진도 늦어지신 거죠?

그런 셈이여. 89년 1월 공직생활 30년 만에, 동기들보다 10년 늦게 서기관 달고 군수로 나갔지. 당시 도지사 장인상에 문상 갔다가 묏자리 싸움 난 걸 풍수학적으로 설명하며 해결해 준 일이 있는데, 그게 고마웠던지 청양군수로 보내주더라고. 향약운동 펼친 거 좋은 평가도 받고 고향서 계속 일하다 정년을 맞고 싶었는데, 91년 초 새 도지사가 상의도 없이 연기군수로 발령을 냈어. 고교 동기인 청와대 수석 출신 임재길이 3ㆍ24 총선 나가는데 "일 잘하고 똑똑한 군수를 보내 달라"고 하더래. 이게 알아서, 잘 해달라는 얘기지. 선거가 다 군수 하기에 달렸던 시절이었거든. 지방단체장 선거를 자꾸 미룬 것도 총선, 대선에 지방공무원들 동원하기 어려워지니까 그런 거잖여.

한 전 군수는 청양군수 시절부터 '목민일기'란 제목을 붙여 매일매일 써온 근무일지에 92년 총선을 앞두고 벌어진 관권개입의 실태를 날짜, 시각까지 밝혀 기록해뒀다.

2월 16일. 도 기획실장, 전화로 총선 위해 도지사 포괄사업비를 풀 테니 군수포괄사업비도 풀어 선심사업도 펴고 관변단체도 지원해서 활용하라고 통보.

2월 19일. 신임 이종국 지사, "당신, 주위에서 바꾸라는 등 말이 많다"고 분위기를 잡은 뒤 "이번 선거에서 직을 걸고 여당후보 당선시키라"고 지시.

2월 28일. 선심사업용 내부무특별교부금 7억원 배정돼 민자당과 협의해 사업 선정.

3월 4일. 이 지사, 조치원읍내 여관으로 불러 500만원(수표) 건넴.

3월 15일. 이 지사, 지사실에서 수표 1,000만원 주며 "현금으로 바꿔 쓰라" 당부.

3월 18일. 도 내무국장, 한 가게에서 "지사님이 주셨다"며 현금 500만원 건넴.

한 전 군수는 쓰지 않고 보관해뒀던 수표 일부를 양심선언 당시 여당 후보 지원을 위한 읍ㆍ면ㆍ리 단위별 공무원 배치표, ○(여당 지지) △(부동표) 붉은 형광펜 줄(반대)로 성향을 분류해놓은 새마을지도자 명부, '지역안정대책협의회 명단'으로 위장한 야당 성향 주민들 리스트 등 각종 문서와 함께 증거물로 공개했다.

-당시 돈이나 부정 지시를 거부할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었나요?

아니었어. 그러면서 참 괴로웠지. 상부의 압력과 지시 때문에, 또 낙후한 지역 발전을 위해 어쩔 수 없다고 자위했는데, 한겨레신문 등에 "군수가 여당 후보 지지"라는 기사가 나오니 양심의 가책을 견디기 힘들더라고. 임재길이 당선되면 그 다음날로 사표 내자고 마음 먹고, 집사람한테도 그리 알라고 했어요. 그런데 개표해보니 졌어. 1만표 차, 야당이 이긴 거여.

-당연히 문책이 뒤따랐겠네요.

도청에서 군수회의가 있어 갔는데, 이 지사가 인사도 하기 전에 "졌는데 그만둬야지" 그러는 거여. 총선 졌는데 대선을 어떻게 맡기냐는 거지. 아니, 군수직 하고 국회의원 선거 하고 무슨 상관이 있냐, 이런 본심이 확 일어나서 버텼지. 감사에 경찰 수사까지 동원됐지만 아무 것도 안 나왔어. 지사가 "나도 어쩔 수 없으니 그만둬 달라"고 사정하는 걸 또 거부했더니, 7월 4일자로 군수직 박탈하고 공로연수 발령을 내더라고.

-퇴임 압박을 받지 않았다면 양심선언을 안 하셨을까요?

그때 나 말고도 결딴난 공무원들이 한 둘이 아니었어. 전국에서 여당 후보가 떨어진 지역 군수 30여명이 잘렸다고 하더라고. 나 하나 잘렸다고 그 생각한 건 아니었어.

-그래도 양심선언이란 게 보통 일이 아닌데….

그 일 당하고 공직생활을 돌아봤어. 선거 때마다 공무원들 부정선거에 동원되는 거 보면서 딱 그만두고 싶다, 하면서도…. 그렇게 오래 마음 속에 쌓여있던 게 툭 나온 거여, 그게 양심이지. 이거 꼭 밝혀야겠다 결심하고, 가족회의를 했어요. 1남4녀 맏이인 아들(한상혁 변호사)은 잘 생각하셨다는데, 집사람은 절대 반대야. 세상이 다 그런데, 그거 밝혔다가 무슨 일을 당하려고 그러냐는 거야. 이부영 의원 비서로 들어간 상혁이 고려대 동창을 통해 민주당에 타진했더니 박계동 의원이 7월 23일에 날 만나러 왔어. 그 양반 말이, 장한 결심 하셨는데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고 애들 앞길도 망칠 수 있으니 한번 더 생각해시고 그래도 해야겠거든 연락하래. 2차 가족회의를 열었지. 그땐 집사람도 승낙하고, 대학 다니던 첫째 딸, 둘째 딸도 다들 하라는 거여. 27일 박 의원한테 전화하니 모시러 오겠대. 국회의사당 박 의원 사무실에서 한달 간 먹고 자면서 양심선언을 준비했어.

-양심선언 하고 바로 아드님 결혼식이 있었죠?

그 놈이 학생운동 하다 대학 입학 6개월 만에 잘렸어. 제적됐다 복학하기를 세 번, 그렇게 어렵게 졸업해 장가 가는데 일이 터지고 만 거지. 9월 5일 식 끝나고 애들 신혼여행 보내려는데 검찰에서 사람이 소환장을 가져왔더라고. 인륜지대사도 모르는 네 놈들이 무슨 검사냐며 호통 쳐 쫓아버렸지. 그날 대전역에서 관권부정선거 규탄대회가 열렸는데 당시 민주당 대표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도 오고, 노무현 전 대통령도 와서 연설했어. 소환에 불응하고 마포 민주당사에서 지내는데, 8일 경찰 수백 명이 쳐들어 와 나를 떠메고 나갔지.

-검찰 수사는 결국 축소 수사, 예견된 결론으로 끝났죠?

부정선거 전국에서 다 벌어진 걸 뻔히 알면서 연기군만의 문제로 축소해버리고 나를 주범으로 몰아 기소했지. 그래도 대전지검서 조사 받고 교도소로 갈 때 동행한 검찰수사관은 "군수님, 우리가 해야 할 일인데… 죄송해요" 하더라고. 교도소에도 소문이 퍼져서 재소자들이 소리 지르며 환영해줬고 옆방에서 속옷이랑 별 거 다 넣어줬지. 운동할 때 만나면 "바로 나가실 테니 걱정 마시라"고 격려하는 이들도 많았고, 교도관들도 꼭 군수님, 군수님 하면서 바깥 소식 일러주기도 하고. 사람들은 그런데 법은 내 편이 아니더라고.

징역형 선고와 파면… 양심선언의 대가는 가혹했다. 1심 결과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한 전 군수가 거꾸로 부정선거의 주모자가 돼 이종국, 임재길씨보다 높은 형량을 받았다. 항소심에서 징역 8월에 집유 1년으로 감형된 뒤 95년 대법원에서 확정됐고, 바로 사면복권이 이뤄졌다. 그 후 정년을 사흘 앞두고 파면 당해 반토막 난 연금, 무너진 공직생활 32년의 명예를 되찾고자 끈질긴 법정 투쟁을 벌였지만, 끝내 패소했다. "가장 가슴 아픈 건… 법정 앞에서 경찰에 맞아 갈비뼈가 부러지는 고초를 겪어가며 뒷바라지를 하던 집사람이 사면되던 해 겨울 세상을 떴어." 그는 기무사 민간인사찰을 폭로한 윤석양 일병의 어머니와 이듬해 재혼했다. "지금 저 사람이 전처랑 법원에서 같이 싸우고 하면서 친자매처럼 가깝게 지냈어. 전처가 대전 내려와 같이 살자고 할 정도였지. 인연이란 게 참 묘해."

-그 후 어떻게 지내셨어요?

95년 사면복권 되고 김대중 총재 권유로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했어요. 청양홍성 지역 지구당위원장을 맡다가 청양군수 선거에 나갔는데 그만 떨어졌어. 그때까지도 뭐 좀 안 해주면 안 찍어줬지. 그런데 중앙당에서 지급하기로 했던 선거사무원 수당 5,000만원을 안 주는 거야. 여당이고 야당이고 정치하는 놈들은 다 도둑놈들이다 싶더라고. 애들 결혼자금으로 모아둔 돈으로 지급하고 당에서 나와버렸지. 이문옥 전 감사관, 이지문 전 중위 등 양심선언자들이 공익 차원의 제보를 하려는 사람들을 돕는 모임을 만들었는데, 이문옥씨 이어 내가 2대 회장을 했지. 지금은 고문인데, 건강도 그렇고 요즘은 잘 안 나가.

-공익을 위해 양심선언을 한 사람들이 배척 받는 분위기도 여전한데요.

사회의 잘못된 부분을 바로 잡으려면 이런 사람들이 제대로 대접받게 해줘야지. 파면 당하고 연금 깎이고 재취업도 안되고 하면 누가 나서겠어. 그런데 내부비리 폭로한다고 다 양심선언이 아니야. 사회를 위해, 국가를 위해, 이런 생각을 갖고 해야지, 개인적인 이득을 따져서 하는 건 안돼.

-20년 전처럼 총선, 대선이 한 해에 치러지는데, 요즘 선거 풍토를 어떻게 보시나요?

아직 멀었어요. 개선해야 할 게 너무 많아. 유권자들도 바뀌어야 하고. 국민들이 선택을 잘 못하면 결국 제 손으로 나라를 망치는 거잖아. 근데 언론도 문제야. 동창회에 갔더니 어느 신문에 박근혜는 호랑이상이어서 이번에 될 거라는 기사를 썼다는데, 기자들이 관상 타령이나 하고 참 한심해. 내가 본 관상은 호랑이가 아니고 고양이상이여.

-지지하는 대선 후보가 있으신가요?

아직 없어요. 다만 민주통합당의 김두관 경선 후보가 "어려서 저희 어머니가 말씀하시길 사람이 귀가 두 개인 것은 말을 많이 들으라는 뜻이다, 그래서 사람 말을 많이 들으려 노력한다"고 했던 말이 가슴에 많이 와 닿더라고. 관상학적으로 얼굴도 좋고.

-남은 바람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스스로 부끄럽지 않게 잘 살았다 싶嗤? 한편으론 덧없다 싶기도 해. 평생 몸담은 공직생활의 명예 회복을 못한 게 한스럽고. 머잖아 죽어질 몸인데, 뭐라도 하나는 남겨야겠다 싶어 회고록 같은 걸 쓰려고 해요. <한준수의 인생 이야기> 라고. 이제 건강도 좀 회복했고, 기억은 여전히 또렷하니 찬찬히 삶을 돌아보며 하나하나 정리해야지."

이희정 선임기자 jay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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