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절시인 이상의 글 가운데 누가복음이 등장한다는 건 정말 의외의 발견이다. 그의 수필 에 나오는 한 토막의 글은 이렇다.
"…. 그러나 공기는 수정처럼 맑아서 별 빛 만으로라도 넉넉히 좋아하는 누가복음을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또 참 별이 도회에서보다 갑절이나 더 많이 나옵니다. 하도 조용한 것이, 처음으로 별들이 운행하는 기척이 들리는 것도 같습니다."
이 대목을 내게 메일링 한 미국 워싱턴의 시인 김명희의 주석도 놀랍다. "이상은 '별들이 운행하는 기척'을 듣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사물에 대한 센스는 너무나 날카롭고 섬세하여 없는 소리도 듣는 것입니다. 없는 소리를 듣는다 함은 상상의 세계이겠지요."
김명희는 이상에 관한한 도사다. 이상의 시 '오감도'(烏瞰圖)를 영역 출간, 미국 출판계에 파문을 일으킨 이상의 권위자로, 이상의 센스를 '없는 소리도 감별해 낼 정도'의 수준으로까지 확대해 읽을 줄 아는 시인이다.
가히 시인다운 접근이다. 귀신이 귀신을 알듯 시인은 시인이 알아보기 마련이다. 허나 내 생각은 좀 다르다. 매사 의심을 주식으로 반평생 넘어 살아온 기자여서일까, 이상이 거명한 누가복음이 예삿일로 와 닿지 않는다.
'그가 기독교신자였다는 말인가, 마태 마가 요한을 놔두고 왜 하필 누가인가, 누가라는 메타포(은유)를 통해 이상이 정작 말하려던 건 뭘까'… 세 가지 의문가운데 특히 마지막 의문, 누가라는 메타포에 신경이 쓰인다.
누가는 이름 그대로 누가복음을 썼다. 허나 누가복음 말고도 그가 사도행전을 쓴 장본인임을 아는 사람은 흔치 않다. 누가의 이 사도행전이 바로 문제를 푸는 관건이 아닐까 싶다. 사도행전의 주인공은 사도 바울이다. 에 등장하는 누가복음의 메타포가 바로 바울이라는데 나는 하등 무리를 느끼지 않는다. 누가복음-누가-사도행전-바울의 연결고리를 미뤄 볼 때 더욱 그렇다. 이상이 정작 매료된 인물은 연결고리 맨 끝의 바울이었을것으로 나는 확신한다.
27세로 요절한 이 분방했던 시인의 시상(詩想)은 노상 바울의 주변을 맴돈 것으로 보인다. 무슨 수로든 바울을 잡아 자신의 외로운 의식 속에 가둬놓기 위해 2,000년의 시공(時空)을 넘는 생포 작전쯤은 너끈히 벌이고도 남았으리라. 그러자니 수사관처럼 자신의 추적을 숨겨야했고, 그 추적을 더 희석시키기 위해 4개 공관복음 중 하나인 누가복음의 뒤로 숨은 것 같다.
그렇다면 바울은 누구인가. 신약성서의 절반을 쓴 걸물 사도로, 예수를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지구상의 마지막 목격자다. 기독교 2,000년 사상 예수를 가장 최근에 만난 사도도 된다.
여름의 끝자락을 골라 성지순례에 오른다. 바울을 추적하려는 이상의 생포 작전에 나 역시 동참한 격이다. 바울의 생가가 놓인 터키 다소(Taurus)를 찾고 나서 놀랐다. 생가 곁 우물 앞에 놓인 바울의 안내 표지판을 뒤진 즉 몇 개의 단어가 눈에 잡힌다. '코스모폴리턴(범세계론자), 유대학자, 그리스어 페르시아어 로마어에 능통했던 포네틱스(음운론자)'…. 바울은 한마디로 그 시대 천재였다. 성서에 잡히지 않던 바울의 진가는 현장에 가면 드러난다. 현장의 위력이다.
로마치하의 이 천재 유대인을 영특했던 대한제국의 천재시인이 놓칠 리가 없다.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를 절규했던 시인답게 이상은 정확히 날았고 목표물 또한 정확히 포착한 것이다. 둘 다 식민치하의 신민이었다는 사실이 그의 비상(飛翔) 속도를 높였을 것이다.
이상이 임종을 맞아 일본 도쿄대 병원에서 남긴 유언 역시 바울을 대입하면 쉬 풀린다. "멜론이 먹고 싶다"던 유언의 멜론은 어떤 멜론이었을까. 선교사역에 지친 바울이 수시로 깨먹던 이곳에게 해(海)의 멜론이었을 것이다. 엊그제 20일로 탄생 100년을 맞은 고인을 달래기 위해 해본 소리다.
김승웅 전 한국일보 파리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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