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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여름휴가 중인 유럽의 안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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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여름휴가 중인 유럽의 안팎

입력
2012.08.23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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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여름은 휴가를 떠난 현지인들의 빈자리와 휴가 차 방문한 이방인들의 든 자리가 교묘하게 균형을 이뤄 언뜻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일상이 흘러가는 것처럼 보인다. 잘나가는 갤러리나 실험적인 대안공간들 문은 휴가기간을 알리는 쪽지 위로 벌써 먼지가 앉은 채 굳게 잠겨있지만, 전 세계 관광객 대중이 몰려드는 유명 박물관과 미술관은 이때를 겨냥해 기획한 소장품 전시로 문전성시다. 중산층이 거주하는 주택가 및 대학가 주변은 한산하다 못해 촬영이 중지된 영화세트장 같은 기운마저 풍긴다. 하지만 광장과 공원 그리고 무엇보다 역사의 색채가 짙게 덮인 고성이나 교회를 둘러싼 카페촌, 식당가, 쇼핑가는 인종과 소비와 향락의 만국박람회장이라 해도 과하지 않을 정도다.

가지각색의 관광객들은 마치 그곳에 서구 사극의 군중 신을 찍기 위해 불려온 단역배우들처럼 집단적으로 먹고 마시고 뭔가를 산다. 물론 지치지 않고 볼거리를 찾아 사방을 두리번거리다가 이미 남들이 다 찍어 어떻게 찍어도 상투적인 장소 앞에서 포즈취하기는 필수고. 현대미술 리서치를 명목으로 20여일 가까이 유럽도시들을 떠돈 나 또한 그 일부였을 것이다. 그렇게 프랑크푸르트의 뢰머플라츠에서, 카셀 도큐멘타 13이 열리는 프리데리치아눔에서, 베를린의 뮤지엄인젤에서, 안트워프의 현대미술관 인근에서, 암스테르담의 중앙역 서쪽 번화가에서 현대적 삶과 문화의 방랑객들이 만들어내는 특이한 도시 역동성에 한몫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위의 이야기는 표피적이다. 짧은 시간 동안 여러 지역과 장소들을 점처럼 이동하며 둘러보는 투어리스트가 짐짓 자신을 객관화해가며 서술하는 유럽 도시 풍경인 것이다. 여행자이자 일시 방문객의 시선으로 판단한 앞선 이야기가 틀린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정확히 그곳 삶의 세부에 들어맞지도 않는다. 예상컨대, 유럽의 관광산업과 여행객들의 행태와 전 세계 도시들의 글로벌화에 대한 논의를 배면에 깔고 있는 위 이야기는 굳이 현지를 다녀오지 않고도 능히 할 수 있는 그렇고 그런 이야기다.

크고 전체적인 풍경이 아니라 작고 조각난 장면들. 이를테면 내 경우 연구조사를 위해 각종 미술기관 및 행사장을 찾은 일과시간과 그 시간 동안 보고 듣고 나눈 전문적인 내용보다, 이른 아침과 늦은 저녁에 홀로 숙소 주변을 산책하며 얻은 사적 경험들이 더 많이 거기 삶과 문화에 대해 깨닫게 해주었다. 예컨대 나는 독일 중소도시 하겐의 주택가를 서너 번 반복해서 배회하는 과정에서 독일 현대미술작품, 특히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그림이나 토마스 데만트의 사진에 잠복된 주관적 표현의 억제, 견고함을 향한 강박적 충동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 동네의 집들은 모두 완벽하게 페인트칠 돼 있고, 거리로 면한 창틀에는 하나같이 난초나 촛대 같은 것들로 장식돼 있었으며, 저마다의 정원에서는 비슷비슷한 식물들이 자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자신들의 삶이 얼마나 관리가 잘 되고 안정적으로 돌아가고 있는지 그렇게 서로 확인해야 직성이 풀린다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길가 이방인의 귀로 날아드는 집안 누군가의 기침소리와 단단히 닫힌 커튼 안쪽의 흐린 불빛은 그 커뮤니티가 내세운 안정의 확인을 깨는 신호로 다가왔다. 꼭 균열이라고 말할 것까진 없겠으나, 매끈하게 절제된 외피 뒤에서 자작자작 끓고 있는 개인들의 심란한 현실 같은 것이 느껴진 것이다.

여름휴가를 위해 한 해를 산다고까지 말하는 사람들이니만큼 올 여름 유럽 문화예술 기관의 휴지(休止)는 아마 통상적일 것이다. 그러나 정말 그 기관의 구성원들이 경기 좋을 때처럼 지중해 등지로 휴가를 떠났을까 싶은 것은 위와 같은 밤 산책의 경험 때문이다. 또는 정부의 문화예술지원 예산삭감으로 해고가 결정된 채 휴가철의 빈 사무실에 나와 일하고 있는 암스테르담의 어느 미술 프로그램 매니저를 만나서다.

강수미 미술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학술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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