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승장구하던 제약회사의 영업사원은 실적이 오를수록 피폐해지는 자신을 발견했다. 1983년 9월, 헛헛한 마음 달랠 길 없던 그가 우연히 서울 명동의 한 표구사에서 본 것은 이중섭(1916~1956)의 '황소'(1953). "앙상한 뼈가 도드라진, 못생긴 소 그림이었어요. 그런데 쇼윈도로 계속 보고 있자니, 강한 에너지가 느껴지더군요." 26세이던 청년은 수중에 있던 7,000원을 털어 결국 그 그림을 샀다. 사진으로 인쇄된 복제품이었다. 그 후 제약유통회사 대표가 된 그는 2010년 6월 서울옥션 경매에서 '황소' 진품을 35억 6,000만원에 낙찰받는다. 이중섭 작품 경매가 중 역대 최고가다.
미술품 컬렉터 안병광(54) 유니온약품 회장의 일화다. 마음을 다독이기 위해 한두 점씩 사모은 미술품이 이젠 100여 점에 이른다. 30여 년간 미술품을 수집해온 그가 "이젠 혼자만이 아니라 함께 보겠다"며 서울 부암동 인왕산 자락에 서울미술관을 28일 개관한다. 개관에 맞춰 미술컬렉터이자 사업가로서 살아온 인생 여정을 담은 에세이집 (북스코프)도 펴낸다.
지하 3층, 지상 3층 규모로, 미술관 옥상정원과 연결되는 석파정(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6호) 일대를 포함한 대지가 4만 3,000㎡(1만3000여평)에 이른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별장이었던 석파정은 2007년 경매에 나와 안 회장이 인수·복원해 미술관 개관에 맞춰 일반에 공개된다.
안 회장의 컬렉션 인생이 망라된 미술관 소장품은 박수근 천경자 김기창 등 한국의 근·현대 작가들 작품이 주를 이룬다. 이 중 '황소' '자화상'(1955) '환희'(1955) 등 이중섭 작품만 19점이다. 이웃집 살던 시인 구상 (1919~2004)에게 이 화백의 삶과 작품에 대해 들으며 애정이 더 깊어진 탓이다. '구상네 가족'(1955)이란 그림이 남아있을 정도로 시인과 화백은 진한 우정을 나눈 사이.
'황소'에서 꿈틀대는 에너지를 느낀 안 회장은 '자화상'에서 자신의 모습을 본다고 했다. 말년에 정신병원에 입원한 이중섭이 종이에 연필로 그린 그림이다. "이중섭의 '자화상'은 제겐 깨진 거울과 같아요.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나를 동시에 바라보게 합니다. 제가 그랬듯, 누구나 이 화백처럼 슬픈 자화상의 주인공이 될 수 있지요. 그러니 타인에게 더 따스해지자, 위안을 주자고 스스로 다짐하곤 합니다."
이중섭의 작품뿐 아니라 월급을 털어 사 모은 이남호의 '도석화', 신사임당의 '초충도', 나혜석의 '풍경', 박수근의 '젖 먹이는 여인', 오치균의 '감' 등 그간 자신의 손길이 닿은 작품에 대해 할 이야기도 많다. 이들 사연은 에세이집에 담겼다.
초대 관장으로 미술평론가 이주헌(51)씨를 영입한 서울미술관은 29일부터 11월 21일까지 개관전시 '둥섭, 르네상스로 가세! - 이중섭과 르네상스 다방의 화가들'을 연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12월, 부산 르네상스 다방에서 동인전을 열었던 이중섭, 한묵, 박고석, 이봉상, 손응성과 후배작가 정규 등 근대미술의 거장 6명의 회화 73점을 선보이는 자리다. '둥섭'은 이중섭의 이름을 서북지방 방언으로 표기한 것으로, 이중섭의 작품 사인이자 친구들의 애칭이기도 했다. (02)395-0217
이인선기자 kell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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