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일 시민들,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단, 국가의 관점 벗어나 사람을 주어로 말이죠"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 이후 한일 관계는 급속도로 얼어붙고 있다. 이럴 때마다 더욱 불안해지는 이들이 있다. 일본 식민 지배의 결과로 일본에서 살게 됐지만 한국인이라는 정체성과 국적을 포기하지 않는 재일조선인. “재일조선인의 역사와 고민을 아는 것으로 뒤엉킨 한일 관계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재일조선인 2세 서경식(61) 도쿄경제대 현대법학부 교수를 20일 만나 꼬인 실타래를 풀 해법을 들어봤다. 최근 재일조선인의 역사와 인권에 대한 입문서 을 발간한 그는 유네스코 한국위원회가 20~24일 여는 ‘청년역사대화 국제포럼’의 강사로 초청받아 한국에 왔다. 인터뷰는 공교롭게도 주한 일본 대사관이 바로 내려다 보이는 그의 숙소에서 이루어졌다. 그는 침략전쟁과 식민 지배에 대한 반성 없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일본의 태도를 강하게 비판하면서도 양국의 국민들이 감정적인 국가주의에 함몰되지 말고 상황을 직시하도록 역사를 공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일 관계가 경색될 때마다 재일조선인으로서 난처하겠습니다.
“어렵죠. 많이 어렵습니다. 인터넷에 ‘조선놈들’ 같은 욕설이 많이 올라오죠. 문제는 재일조선인, 특히 젊은 세대는 민족 교육을 받을 기회가 별로 없어 자기 역사를 모르니까자신들이 반감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도 그 이유를 모르는 거에요. 그러니까 자기 부정이 되지요. 조선인이 무슨 뜻인지, 왜 여기 왔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에 대한 지식조차 없으니.”
-독도에 관해 일본인들의 관심은 얼마나 큰가요.
“도쿄나 오사카 같은 대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평소 독도 문제에 관심이 없는 편입니다. 그런데 일본 정치 전체가 국가주의적으로 우경화 되어 있기 때문에 독도나 센카쿠 열도, 쿠릴 열도 같은 영토 문제에 굉장히 예민하게 반응합니다. 학자나 정치인보다 일반 시민 중에 젊은 세대가 특히. 독도가 어디 있는지도 잘 모르면서 ‘우리 영토’라고 주장하지요.”
-역사 문제 대립 시 일본의 반응은 어떤가요.
“독도 문제를 가지고 일본 사람들이 항상 하는 주장이 ‘1905년에 시마네현에 편입했고, 국제법적으로 정당한 일이었다’는 겁니다. 거기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니까 청일전쟁이나 러일전쟁, 메이지유신, 근대사에 대한 비판이 없습니다. 침략 전쟁과 식민 지배에 대한 반성이 없기 때문에, 국제 사회가 승인해준 것이니 우리는 죄가 없다고 말하는 겁니다. 하지만 그때 국제법이라는 것은 강대국끼리 합의한 거지, 피해 당사국이 인정한 게 아니죠.”
-최근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 등 강경한 태도를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당혹스럽습니다. 제가 설명을 듣고 싶어요. 왜 갑자기 입장이 변했는지. 이명박 대통령이 지금 하고 있는 주장이나 하는 말 자체는 잘못된 게 아니라고 봅니다. 다만 어떤 목적으로 왜 그렇게 행동하는가에 대해서는 의심스럽습니다. 눈앞의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영토나 역사 문제는 민족 전체의 이익과 존엄이 걸린 문제입니다. 자의적으로 이용하면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런던 올림픽 축구 한일전이나 박종우 선수의 ‘독도 세리머니’ 등 감정이 안 좋을 수 밖에 없는 일련의 사건들이 이어졌습니다.
“올림픽이라는 것 자체가 국가대표로 서로 싸우게 하는 마당인데 국가주의적 주장을 하지 말라는 것은 자기모순 아닙니까. 일장기 히노마루는 나치의 하겐크로이츠(卐) 하고 비슷한 것입니다. 패전 후 이탈리아도 독일도 국기를 바꿨는데, 유일하게 남은 파시스트의 국기가 히노마루입니다. 사소하게 선수 한 사람을 걸고 넘어지는 건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역사 인식과 과거사 반성에 대한 일본의 태도는 자주 독일의 그것과 비교되곤 합니다.
“독일은 자신들의 손으로 6,000건 이상 전쟁 범죄를 기소하는 등 과거사 청산 노력을 했습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전쟁 지도자들이 그대로 남아 전후에 국가 지도자, 기업가, 학교 설립자가 됐습니다. 지금 정치 지도자들도 대부분 그런 이들의 2, 3세입니다. 천황뿐 아니라 키시 노부스케(岸信介) 수상 등 A급 전범도 그대로 남았죠. 점령군 미국이 천황에 대해 전쟁에 대한 책임 추궁을 안 하기로 한 게 발단입니다. 천황제를 이용해 다시 간접지배 하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판단해 도쿄 재판에서도 천황을 면소했어요. 또 제가 항상 비판하는 것이 일본 리버럴파입니다. 히로히토 천황이 1989년 세상을 떠났을 때 산케이ㆍ요미우리 같은 우익 신문들이 천황은 평화주의자였다고 쓴 거야 그려려니 합니다. 그런데 리버럴인 아사히 신문조차 패전 후에 천황제를 남겨둔 것은 일본의 부흥을 위해서는 좋은 일이었다고 썼습니다. 이웃 국가?민족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고 사람들을 죽인 데 대한 심각한 성찰이 있으면 할 수 없는 말이에요. 노골적이고 공격적인 국가주의이고 이기주의죠. 1970년대까지만 해도 일본 사회에서 천황제를 비판하는 이야기가 자주 있었는데 요즘은 거의 볼 수가 없게 됐어요.”
-대학에서 프랑스문학을 전공했는데, 지금 현대법학부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한국도 그렇고 일본도 너무 전문주의적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나는 박사학위도 없고 그리고 학교에서 공부한 것도 프랑스문학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쓸 만하다, 이야기 할 만한 것을 이야기 하고 있다면 임용할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아시다시피 저의 청년 시절에 한국은 유신 시대였고, 형들도 감옥에 있었고 해서 제대로 공부를 안 했어요. 한 20년 동안 소위 백수로 글만 쓰고 지냈죠. 그걸 보고 아, 이 사람이 쓰는 이야기가 쓸만하다고 한 사람이 있어서 책도 나오고 교수도 됐죠.”
-어떤 강의를 하십니까.
“주로 인권과 소수자 문제에 관한 겁니다. 1년 2학기 중 한 학기는 재일조선인 등 일본 내 소수자 문제를, 나머지 한 학기는 나치즘과 유대인, 인종주의의 역사를 이야기합니다.”
-한국에서도 조선족 차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식민주의를 제대로 극복하려면 국가 단위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전에 한국에서 끔찍한 살인사건이 있었는데(조선족 우웬춘이 한국인 여성을 잔혹하게 살해한 사건) 그때 중국놈이 했다고들 하지 않았나요. 너무나 유감스럽고 안타까운 사건이지만 무슨 민족이니까로 몰아가서는 안됩니다.”
-4년 전 2년 간의 한국 생활을 마치고 돌아갈 때 한국이 일본처럼 무기력해졌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인터뷰한 것을 봤습니다. 한국이 지금도 그렇게 보입니까.
“제가 일본으로 돌아간 후에 촛불시위가 벌어졌습니다. 저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라, ‘아, 일본에 사는 사람의 시선으로 한국을 봤을지도 모르겠구나’하는 반성을 했습니다. 그런데 또 촛불시위 끝나고 나서는 조금 무기력하게 보이기는 해요. 그래서 우리 같은 천박한 지식인이 예측할 수 없는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대선을 앞두고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지금은 이 나라가 너무 조용하게 보이네요.”
-일본은 어떤가요.
“일본은 ‘시라케 세대’(‘퇴색하다’‘빛이 바래다’라는 뜻으로 정치 사회 문제에 무관심한 세대)가 너무 오래갔습니다. 올해 원전 재가동 문제로 금요일마다 수만명이 시위를 하고 있는데 조금 상황이 달라진 걸 느낍니다. 수십년 만에 보는 현상이죠. 정당이나 노조 같은 조직이 이끄는 게 아니라 시민과 학생들이 인터넷이나 페이스북을 이용해 시위를 조직하는데, 꼭 우리는 정치적인 주장을 하는 게 아니라고 강조하면서 모입니다. 정부가 무시하고 있긴 하지만 굉장히 중요한 움직임입니다. 한국은 청계천에서 등록금 시위도 하는데, 일본에서는 학생들이 ‘선생님 데모를 해도 되겠습니까’하고 허가를 받으러 옵니다. 일본에서는 친구들끼리 정치적 문제를 얘기하는 거 자체에 대한 거부감이 있습니다. ‘자네는 심각하네, 진지하네’ 이런 게 조롱입니다. 그런 무거운 얘기를 하지 말라는 거죠.”
-일본의 우경화를 큰 흐름으로 이해해도 되는 건가요.
“일본 사회는 정당이나 노동조합 등 정치적인 사회와 일반 시민의 시민 생활이 괴리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바라고 있는 바를 정치적인 언어로 표출할 수 없고, 대표해주는 단체도 없습니다. 야마모토 타로라는 배우가 있어요. 원전 사고 이후 TV에서 도쿄 전력 비판 발언을 해서 TV 출연을 못하게 되었는데, 시민들 사이에서는 히어로가 됐어요. 그런데 이 배우가 독도 문제에 있어서는 일본이 자위대를 동원해 지켜야 한다고 이야기해요. 우파적 사고 방식과 생활 보수적인 모습이 혼재하고 있는 거죠. 생활의 안정에 관심이 쏠려 있고 원전 사고로 불안감이기 크기 때문에 아주 강력하게 ‘생활을 지켜드리겠습니다’하는 우파 정당이 생기면 그 쪽으로 갈 수도 있어요.”
서 교수는 젊은이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했다. “의자가 하나밖에 없다고 하십시다. 그리고 앉고 싶은 사람이 세 사람 있다면 2명은 분명 낙오하게 돼 있어요. 인생에 목적이 하나밖에 없으면 영영 그 낙오자로 살아야 해요. 그런데 목적이 다양하면 낙오자가 아니죠. 넓은 세계가 있는데도 좁은 세상밖에 모르니까 불안하고 불편한 것입니다.”
-항상 경계인으로 어느 나라에 속하지 않는 부유하는 느낌을 가지고 있다고 하셨는데.
“나이 60이 넘으니 새삼 후손 세대에 대해 미안하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식민지 청산 주장을 30~40년 넘게 해왔는데도 사회적인 변혁을 제대로 이루어주지 못해 나쁜 유산을 남겨주는구나 해서요. 제가 10대, 20대이던 때 한국은 유신의 지배 하에 있었지만, 식민 지배와 차별에 대해 일본인들이 반성할 날이 언젠가는 올 거라는 믿음과 목표?있었어요. 평범한 일본 시민들도 천황 같은 봉건적인 제도가 언제까지 남아 있겠냐는 얘기를 했지요.돌이켜보면 지난 30~40년 동안 일본 사회는 계속해서 나쁜 방향으로 흐른 것 같습니다.”
한일 관계에 대한 조언을 듣고자 ‘한국도 사랑하고 일본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라고 운을 뗐는데, 그는 “한국도 일본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다. 다만, 일본 국가나 정부는 싫어하지만 일본의 풍경, 음식, 좋은 사람들을 사랑하며 한국 역시 국가가 아닌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한일 축구 경기를 할 때 어느 쪽을 응원하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는 서 교수는 “그것이야말로 국가적으로 인간을 편성하는 사고 방식”이라며 자신은 아름답게 경기하는 편을, 더 가난한 나라를 응원한다고 했다.
-한일 관계의 해법으로 양국에 조언을 한다면.
“일본 정부는 진지하게 역사 문제를 성찰하고 반성해야 합니다. 역사 교육을 제대로 하고 사과할 것은 사과해야죠. 한국 정부에 대해서는 역사 문제를 단기적인 정치 목적으로 이용하지 말라고, 민족적인 대의를 자신들의 좁은 이익에 이용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합니다. 양국 국민에게는 국가와 자신을 일치시키지 말고 동아시아라는 공간에서 평화롭게 사이 좋게 지낼 수 있는 길을 자기 스스로 생각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국가가 이렇게 하니까 올바르다는 식으로 국가에 몸을 맡기고 기대하면 안 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실을 제대로 아는 것이죠. 역사라는 것이 대부분 국가를 주어로 쓰여 있어요. 한국이 이렇게 했다, 일본이 이렇게 당했다는 식으로. 국가가 아니라, 그 공간에서 살아온 사람을 주어로 역사를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국가라는 틀을 넘어서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타자에 대한 상상력이 중요합니다.”
오미환 선임기자 mhoh@hk.co.kr
김범수기자 bskim@hk.co.kr
채지은기자 cje@hk.co.kr
이윤주기자 misslee@hk.co.kr
전혼잎 인턴기자 (한양대 국문 4년)
■ 서경식 교수의 두 형 서승·서준식씨 '재일동포유학생 간첩단 사건' 연루
서경식 교수에게는 서승과 서준식이라는 유명한 두 형이 있다. 두 형은 박정희 정권의 대표적 조작 사건인 '재일동포유학생 간첩단 사건'의 주범으로 수감되어 각각 19년과 17년의 형을 살았다. 그동안 그는 재일조선인의 처지나 한국 사정을 알게 되고 역사 공부도 하게 됐다고 했다.
일제시대 철도건설 노동자로 일본에 건너간 할아버지 대부터 일본에서 산 그는 조국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형들은 고교 졸업 후 한국으로 유학 왔다가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는데 간첩사건으로 누명을 썼다. 그는 형들의 옥바라지로 청춘을 보냈다.
현재 서승씨는 일본 리쓰메이칸 대학교에서 정년퇴임하고 특임교수로 후학을 가르친다. 한국에서 인권운동을 펼치던 서준식씨는 계속 국내에 머물며 떨어져 있다. 형들의 근황을 묻자 "가족이라는 것이 자주 안 만난다고 해서 사이가 나쁜 것이 아닌데, 한국사회는 너무 굴레에 갇힌 것 같다"는 답이 돌아왔다. 스스로 개인주의자라고 말한 그는 개인주의를 피가 차갑다고 보는 것은 오해라며 타인에 대한 존중이 개인주의의 특성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일본 와세다대학 불문과를 졸업한 그는 한동안 백수로 지내며 글만 쓰다가, 우연히 그의 글을 알아본 이의 제의로 책을 내면서 알려졌다. 그렇게 해서 나온 <소년의 눈물> 로 1995년 일본 에세이스트클럽상을 받았다. <경계에서 춤추다> <디아스포라기행> <언어의 감옥에서> <나의 서양음악 순례> 등 여러 권의 저서가 있다. 소수자의 시선으로 본 인권과 민주주의가 그의 주 관심사다. 한반도 평화 정착과 민주주의·인권 신장에 기여한 공로로 '김대중 학술상'을 받았다. 품격 높은 미술 에세이를 쓰는 작가로도 잘 알려져 있다. 나의> 언어의> 디아스포라기행> 경계에서> 소년의>
채지은기자 c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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