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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연재소설 여울물소리] 4. 부평초 하얀 꽃 <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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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연재소설 여울물소리] 4. 부평초 하얀 꽃 <103>

입력
2012.08.21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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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그믐이에게 남장을 입혀 공연하게 하는 것과 이신통과 부부로 내세우자는 것으로 의논이 끝났고 이를 물주인 박삼쇠가 그믐에게 알려주었다. 그믐이도 반대를 하지는 않았고 나아가서 자기의 이름도 놀이패에 걸맞게 바꾸자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그믐은 잠깐 생각해보더니 아무렇게나 스스로 지은 이름을 말해 보였다.

백화가 어떨까요?

꽃이 백송이란 얘기여, 하얗다는 얘기여?

하얀 쪽이 낫겠네요.

박삼쇠는 그믐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하니 좀 섭섭했는지 캐물었다.

어찌 그런 생각이 들었는고?

이 집 담장에 올라간 박꽃이 소담스러워요.

박꽃보단 부평초 백화가 낫겠군.

이렇게 되어 여성 명창 백화가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박삼쇠 연희패는 본래가 소리꾼들이라 사당패처럼 줄타기라든가 땅재주나 꼭두각시놀음 같은 다채로운 재간을 팔지는 못했지만 음률 장단이 한양서 놀던 기량이라 멋이 있었고, 무엇보다도 삼현육각의 어우러진 연주와 광대들의 한량 춤은 세련되었다. 거기에 마당 사이를 잇는 재담과 발탈은 놀이판의 흥을 더욱 돋웠다. 맨 끝 순서로 구름 같은 갓을 쓰고 요즈음은 없어진 옛날식의 소매 넓은 도포를 입은 백화가 나와서 가곡과 잡가를 부르니 놀이판의 흥취와 풍류가 절정에 이르렀다. 시골 어촌이나 갯가 마당에서 여창을 듣는 일이 흔치 않거니와 비록 남장은 했을망정 한양 도성의 우대에서 놀던 물색이 맞아 떨어지는지라 어쩐지 함부로 할 수 없는 기품이 엿보였다.

백화의 이름과 재간이며 자태에 대한 소문이 한 달 사이에 일대로 퍼져 삼월 초에 내포 지경의 온양 예산 덕산 홍성 등으로 내려가니 일대의 군교 아전들은 물론이요 양반들까지 놀이판에 구경을 나왔다. 양반들은 체면 때문에 상민들의 놀이판에 내놓고 끼어들 수는 없어서 멀찍이 자리 잡고 앉아서 귀동냥을 하는 신세였다. 그들은 나중에 하인이나 아전들을 보내어 시회를 열고자 하는데 심백화 여창을 초치하려 한다고 놀이 행하의 액수를 미리 알려주기도 하며 점잖게 청하는 것이었다. 박삼쇠는 약조된 놀이판이 많아서 일일이 응하지 못한다고 사과의 말을 늘어놓아야 했다. 간혹 어느 양반 서방님은 부친의 환갑잔치에 백화를 비롯한 한양 소리꾼들을 불렀는데 이러한 자리에는 마지못해 참석을 하였다.

삼월 말이 되어 박삼쇠 패거리는 서울로 돌아갔지만 이신통과 백화는 천안 단우물 집에서 당분간 머물러 있었다. 신통이 저녁 먹고 나서 술추렴이나 하고 지내기는 뭣하여 봉노에 나아가 강담사도 하고 전기수 노릇도 하더니, 하루는 열 명이 채 못 되는 소리꾼들과 함께 객점에 들었던 호남 광대 박돌이란 이와 사귀게 되었다. 신통이 언패를 읽고 물러나 막걸리 잔을 들고 있는데 그가 슬며시 다가앉으며 말을 걸었던 것이다.

여보쇼 그 좋은 재간들을 그냥 묵히고 있을 셈이우?

신통이 돌아보니 검은 더그레에 패랭이 쓴 차림새가 편안하여 얼른 대꾸했다.

책이나 읽은 게 무슨 재간이랄 수 있겠소?

내가 홍성 조양문 앞 장 거리에서 댁들이 노는 걸 슬쩍 넘겨다 본 적이 있우. 저 거시기 댁네 아낙이라 하든가, 머시기 백화라 하든가? 소리가 썩 좋습디다. 목청은 남도 청인데 아쉽더구먼.

뭐가 아쉬워요?

음률과 가락을 타고 넘어가는 솜씨가 필시 명창인데, 노는 게 우리와 달라서. 경서도 소리는 간드러지고 흥은 있지만 깊이가 없어서 몇 번 들으면 심심하지요.

어디서 오셨는지?

우리야 완주에서 왔지요. 호남은 들판이 장대하고 물산이 풍부한 데다 인심과 정이 넘치는 고장이우. 뼈 빠지게 일하고 징허게 놀 줄 알지요.

그 깊이란 게 무슨 말이오?

사는 게 기쁘고 슬프고 화나고 즐겁고 날씨 바뀌듯 하지 않습디까? 일테면 기쁨과 즐거움은 새벽이슬처럼 덧없이 스러지고 슬픔은 상여 타고 북망으로 갈 때까지 길게 이어진다오. 인생이 고해라고 하지 않소? 살며 겪은 것들이 녹아들어야 그늘이 생긴다고 하지요. 남도의 소리는 그늘에서 시작되오.

그날 밤 이신통은 박돌이와 늦도록 술을 마셨고 나중에는 뒷방으로 가서 백화도 어울려 나직하게 단가도 읊조리면서 새벽녘에야 마무리가 되었다. 그들은 금강을 건너 남도 쪽으로 함께 내려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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