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해외 지사로 발령이 난 사람들은 살던 집의 처리 방법을 놓고 여간 고민이 아니다. 몇 년 전만 해도 다들 맘 편히 전세를 놓고 다녀올 수 있었다. 3년~5년 후 돌아오면 집값이 수억 원씩 올라있으니 다른 대안을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이제 상황이 180도 달라졌다. 수도권 아파트값 하락세가 4년째 이어지는 가운데 글로벌 불황이 장기화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1,000조원을 웃도는 가계부채와 인구구조의 변화도 주택시장의 미래를 어둡게 만드는 요인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당장 급매물로라도 집을 처분하고 떠나지 않으면 나중에 계륵(鷄肋)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라는 불안감이 드는 것도 당연하다.
집값 하락세가 몇 년간 더 지속돼 자산 디플레가 심화하면 일본 같은 장기 불황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우리 경제의 뇌관으로 떠오른 가계부채의 3분의 1은 주택담보대출이다. 하우스푸어 같은 주택 보유자들이 상환 압력에 몰려 급매물을 내놓기 시작하면 일본처럼 버블 붕괴가 오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는 것이다.
물론 정부의 입장은 다르다. 우리나라는 일본과 달리 집값 거품이 크지 않다는 것인데, 가계부채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하는 논리가 있다. '총부채상환비율(DTI) 등의 금융 규제를 통해 과도한 대출을 막아온 만큼 국내 주택시장이 일본처럼 장기 침체로 이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주장이다. 주무 부처인 금융위원회 김석동 위원장은 최근 DTI 완화를 압박하는 여당 의원의 공세에 "날씨가 아무리 춥더라도 집 기둥을 뽑아 불을 땔 수는 없다"며 규제의 필요성을 역설하기도 했다.
정부 주장대로 금융 규제의 실효성이 대단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정치권의 압력과 경기 부양의 유혹을 뿌리치고 DTI 규제를 꿋꿋이 지켜온 점만은 평가해줄 만했다. 그러던 정부가 성역처럼 여겨지던 DTI 빗장을 열어젖혔다. 젊은 직장인들의 10년 뒤 예상소득과 고정수입이 없는 노인들의 자산까지 소득으로 인정해 대출을 늘려주겠다는 것이다. 조만간 취득세 한시 감면 등 주택거래 활성화 대책도 추가로 내놓을 모양이다.
대선을 앞두고 서민 경기를 살리기 위해선 부동산 거래의 숨통을 틔워줘야 한다는 여권의 절박함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빚을 늘리는 방식으로 문제 해결을 뒤로 미루는 것이어서 심각한 후유증이 불가피해 보인다. 설령 주택 거래량이 다소 늘어난다 해도 경기가 나빠져 소득이 줄어들면 빚만 더 쌓이는 악순환에 빠질 수 있다. 어찌 보면 젊은 직장인들이 갚을 수 없는 빚을 미리 떠안는 셈이고, 결국 가계의 부실을 키워 미래 세대의 부담만 가중시킬 우려가 크다. 취득세 한시 감면도 미래의 거래량을 앞당겨 쓰는 미봉책에 불과하다. 2010년 7월부터 10개월간 취득ㆍ등록세 감면으로 지난해 주택 거래량이 크게 늘었지만, 올해는 그 부작용으로 거래가 바닥 수준으로 떨어졌지 않은가.
최근의 주택경기 부진은 국내외 경기 침체와 과도한 가계부채, 고령화ㆍ저출산에 따른 인구구조의 급변 등 복합적인 요인에 따른 것이다. 특히 가계부채는 주택 시장을 침체에 빠뜨린 주범으로 볼 수 있다. 지금도 서민들은 물론 상당수 중산층까지 이자 내기가 버거울 정도로 빚에 짓눌려 있는 게 현실이다. 더욱이 예전처럼 집값이 꾸준히 올라줄 가능성이 희박해 집을 소유하고픈 욕구가 많이 줄어들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DTI 완화는 과도한 빚 부담 탓에 집을 살 여력이 없는 대다수 국민들에게 빚을 더 늘려 집을 사라고 부추기는 꼴이다. 금융 규제를 풀어 일시적으로 거래가 살아난다 해도 그 부담은 고스란히 다음 정부로 넘어갈 수밖에 없다. 지금은 가계 빚을 늘려 주택경기를 떠받치는 식이 아니라 가계의 실질소득을 늘리는 근본적인 해법을 모색해야 할 때다. 허리 띠 졸라매기에 급급한 국민들의 빚 부담을 줄여줘야만 가처분소득이 늘어나고 젊은이들도 주택 구매에 관심을 보일 수 있다. 내 집 마련의 기회를 늘리는데 초점을 맞춘 정부의 주택정책도 장기전세주택과 공공임대주택의 공급을 늘리는 방향으로 바뀌는 게 옳다.
고재학 경제부장 goindo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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