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대학생들의 '창작 동아리' 모임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다. 스스로 창작한 이야기를 써 갖고 와서 발표하고 중구난방 합평하는 모임이었다. 이런 식의 문학 모임을 경험한 기성세대는 적지 않을 것이다. 문학회나 창작 동아리는 예전의 대학의 어디에나 있었다. 아니 고등학교 문예반의 역사는 그보다 훨씬 광범위하며 오래 됐고, 1980~90년대에는 노동조합이나 지역 노동자 모임에서도 문학회가 꽤 활발했다. 모두 작가가 되겠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모여서 함께 이야기하는 것이 모두에게 중요한 문화였던 것이다.
그런데 대학에서 이런 모임이 활발하게 움직이는 것을 본 것은 사실 꽤 오랜만이다. 2000년대 중후반까지 대학문화는 처절하게 망가졌다. 대학에 당연히 있어야 할 자치와 자발적 청년문화의 모임들은, 마치 신자유주의가 청년들의 영혼을 시들게 한 것과 똑같이 사그라들고 있었다. 스펙을 쌓고 눈앞의 이익을 위한 일이 아닌 그 모든 것이 '잉여짓'으로 간주되고 인문학이 홀대 받았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대학체제가 강고함에도 불구하고 근 2~3년 사이에 대학생들의 자치와 자발적 문화는 뭔가 재생하는 느낌이 있다.
흥미로웠던 것은 글쓰기 모임에 나오는 대학생들의 선호나 지향이 '후기 문자문화의 시대'의 다층성에 어울린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들의 일부는 전통적인 의미의 소설에 관심이 많지만, 역시 그보다는 TV드라마나 영화 대본 같은 장르에 관심이 깊은 경우가 더 많았다. 그 중에는 벌써 네 번째 작품을 발표한 '작가'도 있었는데, 그의 작품은 중고등학생들한테서 주로 읽히는 게임 환타지라는 장르란다. 이전에는 없던 미디어 문화의 경험을 문학적 실천으로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글은 상품이 아니다, 작가의 영혼이다'는 명제를 큰 소리로 외친 학생도 있었다. 아마도 이런 모임에는 고전적인(근대적인) '문학소녀'나 문청의 영혼을 가진 이도 있기 마련이리라. 하지만 그 외침이 터져나왔을 때 동아리 성원 모두는 박장대소하며 웃었다. 그들은 그 명제가 가진 날카롭고도 유머러스한 경계를 잘 이해하며 느끼고 있었다. 시대의 문학은 언제나 상품이며 동시에 영혼이다. 그리고 이런 신자유주의 시대에 '문학은 상품이 아니다'는 말은 그야말로 진하고 수준 있는 농담이다. 어른스럽고도 다양한 대학생들은 과도기적인 '후기 문자문화의 시대'의 총아라고 느껴졌다.
인구 전체가 글을 읽고 뭔가를 쓰는 문자문화의 시대는 여전히 잘 이어지고 있다. 글쓰기와 독서는 여전히 문화를 이루는 바탕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쏟아지는 영상 정보와 인터넷 문화가 이미 책과 문학의 절대성을 해체해버린 것 또한 사실이다. 총선ㆍ대선에 올림픽까지 겹쳐 2012년의 출판계의 불황과 양극화는 극심하다고 하지만, 이는 단지 일시적인 현상은 아닐 것이다. 특히 과발달한 스마트폰 문화가 한국의 후기 문자문화의 시대를 규정한다. 노소를 불문하고 비싼 통신비를 꼬박꼬박 내며 LTE망에 접속한다. 모두 언제 어디서나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다. 저절로 책은 뒷전으로 밀려난다.
스마트폰 문화는 '지적 격차의 구조'나 '공론장의 구조 변동'을 위시한 문화정치 전반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현상적으로 스마트폰은 민주주의 문화를 진전시키는 것으로 뵌다. 그러나 문화의 피상성과 즉물성이 더 커지고, 숙고하며 깊이 읽는 능력이나 글쓰는 능력은 전반적으로는 퇴화하고 있는 것도 사실일 것이다. 트위터의 소통 구조에서 보듯, 의미 있는 내용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은 소수만이 갖게 될지도 모른다.
미디어 테크놀로지의 발전이 지나치게 빠르기 때문에, 불변하는 인간적 가치와 미래적인 소통 방식을 조화시키는 방법에 대해 사실 아무도 정확하게 모른다. 다만, 독서능력과 글쓰기가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또다시 문화적 계급투쟁의 고지가 될지 모른다는 것 정도는 짐작할 수 있다. 이 '후기 문자문화의 시대'에 다수를 위한 독서교육과 (인)문학의 존재방식을 여전히 고려해야 하는 이유이다.
천정환 성균관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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