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에 연재된 '시로 여는 아침'을 통해 깊이 있는 안목, 유려한 독법, 청신한 언어를 선보인 진은영 시인이 세 번째 시집 <훔쳐가는 노래> (창비 발행)를 냈다. 새로운 감각과 형식을 통해 2000년대 시단의 '뉴웨이브'(평론가 신형철)로 주목받은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우리시대의 정치, 사회적 고민을 담백한 시로 담아낸다. 진씨는 이메일 인터뷰에서 "터져 나오는 목소리를 굳이 숨기려하지 않았다"고 했다. 훔쳐가는>
진씨의 시가 정치, 사회적 맥락으로 해석되기 시작한 것은 2009년 용산참사,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등 일련의 시국사건을 겪고 젊은 작가들이 거리로 나왔을 무렵이다. 밀실 속 젊은 문인들은 시국선언인 6ㆍ9작가선언 이후, 용산참사 1인 시위, 두리반 낭독회 등 정치, 사회적 활동을 통해 새로운 고민을 갖게 됐다. '첨예하게 미학적이면서도 정치적인 작품을 쓰고 싶다'는 욕망은 문학계 최대 이슈가 됐고, 진씨가 2008년 계간지 <창작과비평> 겨울호에 발표한 산문 '감각적인 것의 분배'는 이런 고민을 드러낸 상징적인 글이 됐다. 창작과비평>
진씨 역시 이런 활동을 통해 변화를 겪었다. 새 시집은 이런 변화의 지점에서 쓰인 시를 담았다. 그는 "(이번 시집은) 여러 종류의 만남에 영향을 받았다"며 "아름다운 동시에 미학적일 수도 있는 코뮌의 구성원이 되려는 걸음을 시작한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 몇 년 간 정치 사회적 의미를 지닌 활동들을 했는데, 그런 '목적의식적' 활동들이 어긋나면서 슬픔, 놀람, 절망,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되더군요. 삶이 우리로부터 뭔가 훔쳐간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 약탈의 순간이 사랑의 순간과 겹쳤어요. 의도하지 않은 결과들, 그런 결과의 연쇄를 우리가 삶이라고 부르는 게 아닐까요."
표제작을 '훔쳐가는 노래'로 정한 것은 이런 배경에서다. 제목은 동시에 첫 시집에 오마주를 바쳤던 최승자를 비롯해 백석, 기형도, 김남주, 영국 시인 오든까지 다양한 선배들의 작품을 전유해 미학적 갱신을 시도한 자신의 시작(詩作)을 은유하는 이중적 의미를 담고 있다.
이번 시집에 실린 시는 이전 두 권의 시집에 비해 이야기적 성격이 한층 강하다. 4대강, 한진중공업 파업, 용산참사 등 일련의 사회적 사건에서 모티프를 딴 시는 부제목, 인용구절 등을 통해 그 맥락을 밝히고 있다. 그렇다고 현실 문제를 직설적으로 묘사하거나 고발하는 80~90년대 리얼리즘 문학의 한계를 답습하지는 않는다. 철학적 사유와 성찰이 깃든 매혹적이면서도 간명한 시편이 저마다 강렬한 인상을 준다.
<세상에서 나를 제일 증오하던 이가 죽었다 그는 다시 태어나 내 몸이 되었다 세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했던 죽어 강이 나의 정오, 자정 부드러운 머릿결이 모든 계절로 벌어진 과일과 별의 향기를 뿌리며 네 개의 강으로 지나갔다> ('망각은 없다' 의 일부) 세상에서>
이 목소리가 공감대를 얻는 것은 시인 개인의 경험을 빌어 말하기 때문이다.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를 비롯해 '멸치의 아이러니' '그 머나먼' 등은 한 사람의 철학도가 시인이 된 사연, 최근 2,3년간 시인으로 고민한 지점을 보여주는 시다.
<엘뤼아르보다 박노해가 좋았다 더 멀리 있으니까 나의 상처들에서 연필보다 망치가 좋다, 지우개보다 십자나사못 성경보다 불경이 좋다 소녀들이 노인보다 책상에서 분노에게서 나에게서> ('그 머나먼' 중 일부) 엘뤼아르보다>
시인은 "시와 노래는 많이 훔쳐갈수록 아름다워지는 법이다. 제가 드리지 않았지만 독자가 제게서 훔쳐가는 걸 보고 싶다"고 말했다.
이윤주기자 mis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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