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신통과 그믐이는 박삼쇠 연희패와 과천에서 만나 천안에 당도했다. 한양에서 삼남 길을 따라 내려오자면 천안 삼거리가 나오는데, 동쪽으로 목천 지나 충주로 빠져서 문경새재를 넘어가는 영남 길과, 남쪽으로는 공주 논산 거쳐서 전주로 가는 호남 길로 갈라지며, 서쪽으로 내포평야가 시작되는 아산 면천과 예산 덕산 홍성으로 이어진다. 그들은 해마다 유람을 나와서 천안을 근거지로 하여 충청도 일대를 놀고 다니다가 보리 수확이 시작될 즈음에 한양으로 돌아가기도 하고, 찾는 고을이 많아지면 아예 단오놀이 때까지 머물기도 하였다. 박삼쇠네 패가 해마다 머무는 삼거리 장터의 단우물 주막에 들었다. 그곳은 바로 남쪽에 공주 길로 넘어가는 도리재(道里峙)가 보이고 아산 쪽에서 흘러들어온 바닷물이 개천을 따라 역류해 들어오는 곳인데도 그 집 우물은 다른 데와 달리 물이 짜지 않고 시원해서 단우물 집이라고 이름이 붙은 곳이었다. 삼쇠네 놀이패는 먼저 아산 면천 당진 서산 길을 돌아다니기로 하였는데 이 지역의 크고 작은 포구마다 고깃배가 몰려들어 봄철 파시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산 온양 신창 면천이 모두 한나절 거리여서 광대물주 노릇을 맡은 박삼쇠가 한 바퀴 돌며 어계나 동계의 향임들과 교섭을 하기가 수월했던 것이다. 박삼쇠는 놀이를 나가기 전에 조대추 이신통을 불러 의논했다.
이번에 그믐이를 우리 놀이패에 데려온 것은 세상 풍속으로 보자면 놀랄 만한 일일세. 예전에 사당패라 하여 여사당들을 데리고 다녔는데 그때에는 재간을 파는 것은 뒷전이고 몸을 팔고 다녔다네. 풍속을 어지럽힌다 하여 나라에서 금한 뒤로는 남자들만 광대로 놀게 하였으니 남사당이 된 게 아닌가. 탈춤이 되었거나 사당놀이가 되었거나 여자 역은 모두 남자나 어린 무동이 놀게 되어 있다네. 계집의 소리나 재간을 보자면 기방을 찾아가야 하지. 헌데 우리 패에 그믐이 같은 여명창이 들어왔으니 아마도 대번에 소문이 날 게여. 서북 지방에서는 간혹 놀이패에 기녀들이 동행을 한다 하였으니 남장을 입힐까 하네. 그것도 상민의 복색이 아니라 의관정제한 선비의 차림새가 어떠할지.
조대추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기 의견을 말하였다.
우리가 장사치나 뱃사람들을 상대한다 하여도 고을마다 아전붙이나 돈냥깨나 있다는 고을 토호들이 있는데 저들이 반반한 그믐이를 그냥 내버려둘 리가 있나. 분명히 온갖 트집과 구실을 대어 그믐이에게 집적댈 걸세. 기왕에 이리 되었으니 이 서방과 부부가 되면 어떻겠나? 부부 광대라 이 말이지. 지아비가 있다면 내외가 엄정한데 욕심이 생겨도 감히 어쩌지는 못할 게 아닌가.
자넨 어찌 생각하나?
박삼쇠가 당사자인 이신통에게 물었고 그는 우물쭈물 대답했다.
그야…… 저보다는…… 그믐이에게 물어봐야지요.
아니, 그럼 자네는 그동안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게야?
조대추가 말하고는 손가락을 꼽아 보았다.
애오개 주막집에서 이틀 잤고, 과천에서 하루 잤고, 여기 천안 와서 봉놋방에서 이틀 잤으니 벌써 만리장성을 다섯 번이나 쌓았겠구먼.
봉노에서야 우리하구 다 같이 잤으니……
박삼쇠가 그렇게 말했지만 조대추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냐, 그건 말이 안 되지. 그믐이가 벽 쪽에 붙어 자구 바로 그 옆에서 이 서방이 잤는데, 내 소싯적 같았으면 진작 요절을 냈을 걸세.
박삼쇠가 주먹을 쥐어 조대추의 상투머리를 호되게 쥐어박았다.
이 자식아 아무리 농담이라지만 요절이 뭐야? 밥식구끼리……
하고 나서 박삼쇠는 이신통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자네 상투 꼴로 보아서는 장가를 든 모양인데, 고향에 마누라가 있는 겐가?
신통이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니 삼쇠가 말했다.
까짓 유랑하는 신세에 그냥 데리구 살지. 자넨 그믐이가 별로 내키질 않는 모양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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