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어, 나 우리 편이우!
신통이 두 팔을 올려 막는 시늉을 하며 급히 외치니 모두들 맥이 빠졌는지 한숨을 내쉬고 주저앉아 버렸고 박삼쇠도 호미를 내던졌다.
이러니 죄짓고 못 살아. 이 사람아, 자네 때문에 우리는 집에두 못 가게 생겼네.
서로가 어제 있었던 일들을 얘기하는 중에 신통이 그믐이를 데리고 애오개 쌍버드나무집으로 왔다는 말을 듣고 박삼쇠는 어깨를 늘어뜨리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자들이 이대로 잠자코 얼렁뚱땅 넘어갈 리는 만무한데, 참 걱정일세.
그들은 신통과 그믐이 먼저 달아날 때에 뒤미쳐서 마루로 나왔고 안방 쪽에서 나장 복색을 한 놈과 두루마기 차림의 사내가 뛰쳐나오자 조대추가 앞서 나오는 자의 가슴을 돌려차기로 질러버렸다고 하였다. 두 녀석은 서로 붙안고 안방 미닫이를 부수며 나가떨어졌다는 거였다. 그들이 대문을 나와 수표교 쪽으로 뛰는데 이쪽도 네 사람이라 감히 뒤따를 생각은 못하고 한 녀석이 개천가에 서서 나중에 으름장만 놓았다고 한다. 신통이 조대추에게 물었다.
아니 그런데 발길질은 또 언제 배웠우?
우리가 그래두 칠패 왈짜들인데 태껸을 모를 리가 있겠나?
뭐라구 을러댑디까?
뭐 나중에 잡아 족치겠다구 그랬든가?
모두들 나중에 보자는 놈치고 변변한 놈이 없다거니 하면서 웃어대는데 삼쇠는 웃지 않았다.
그자들이 누군가? 하나는 대전별감이고 또 한 놈은 의금부 나장이라구. 일대가 녀석들의 밥벌이 터나 매한가지 아니던가. 그믐이와 자네를 꼭 잡아 족치려 할 걸세.
조대추가 턱을 치켜들고 다리를 건들거리며 명랑하게 받았다.
까짓것, 잘되었네. 이참에 외방 유람이나 떠났다가 춘삼월 다 보내고 돌아오면 세월에 장사 있다든가.
하여튼 떠나기는 해야겠지만 경조(京兆) 유람은 빼고 막바로 도계를 넘어 가야겠네.
의논이 되어 신통과 그믐이 먼저 길을 떠나 과천 어름에서 기다리고 박삼쇠와 조대추가 패거리를 모아 뒤따라오기로 하였다. 이튿날 신통은 그믐이와 함께 낮 동안은 객점 뒷방에 처박혀 있다가 날이 어두워진 뒤에 얼른 문안으로 들어가 돈의문에서 지척인 야주개 그녀의 셋집으로 찾아갔다. 신통은 골목 어귀의 어둠 속에서 잠시 기다렸고 그믐이 초가삼간 집에 들어가 옷가지 등속을 꾸려 작은 고리짝에 멜빵 걸어 짊어지고 나왔다.
그들은 곧장 쌍버드나무집으로 돌아와 그 밤을 지내고 이튿날 이른 새벽에 길을 떠났다. 애오개에서 곧장 청파 배다리를 지나고 동작나루에 당도하니 동녘에서 해가 떠올랐다. 이른 아침에 한양 도성으로 들어가려는 행객들이 몰려서 배들이 연이어 닿았고 남쪽 나루로 건너는 이들은 많지 않아 그들은 이내 강을 건넜고 나루터에서 아침 요기를 하였다. 남태령을 넘어 과천에 당도하니 늦은 오후였고 그들은 술막거리에서 숙소를 얻어 들었다.
박삼쇠는 애오개와 칠패 그리고 청파 배다리 이외에도 용산 삼개와 마포 동막과 노량진 패거리들 가운데 연희 이외에는 별다른 업이 없어 제각기 현지에서 광대노름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자들을 수소문하여 이십 여명의 연희단을 모았다. 이들은 소리와 잡가에서부터 풍물과 삼현 육각을 연주할 수 있는 기량을 가진 자들로 계절마다 사계축놀이에 참가했던 터여서 서로 어느 동네 누구라고 알 만한 사람들이었다. 농사나 수공업을 하면서 식구를 먹여 살리는 이들은 집과 동네를 벗어날 수 없었지만, 처자식이 없거나 가족에 구애받지 않는 사람들과 머물러 있어봤자 저자의 열립꾼이며 행상으로 연명해야 하는 자들은 제각기 농한기에 지방으로 놀이를 팔러 나다니기 마련이었다. 광대물주들이 그러한 놀이패를 모으러 다녔지만 같은 놀이꾼인 박삼쇠가 기별하자 모두들 제 악기 한두 가지씩 집어 들고 모여들었다. 약속 장소인 동작나루에 이르니 지역마다 삼삼오오 모여든 것이 스무 명이 넘었다. 박삼쇠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더라도 이 정도의 실력과 인원이면 온갖 잡기를 화려하게 보여주는 남사당패에 견줄 만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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