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가 침체기에 접어들면 경제권에 속한 모든 경제주체가 모두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정부는 세수가 줄어 제 할 일을 못하고, 기업은 매출 감소와 재고 증가를 피할 수 없다. 개인은 소득이 줄어 삶의 질이 나빠진다.
그러나 수출과 수입이 자유로운 개방경제의 경우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탈출구가 하나 있다. 바로 환율 변동이다. 경기 침체에 빠진 나라의 통화 가치는 하락하기 마련인데, 이 경우 상대적으로 생산단가가 낮아지고 수출시장에서 가격 경쟁력이 높아져 다른 나라 제품보다 더 유리해진다.
파이낸셜타임스(FT)와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환율의 평형 효과를 가장 잘 보여주는 최근 사례가 유럽이다. 최근 유로화의 하락세는 전례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가파르다. 달러 대비 유로화 가치는 올해 2분기 동안 5% 하락했고, 1년 전에 비해서는 13%나 하락했다. 엔화 및 위안화 대비 가치도 1년 만에 14% 떨어졌다. 결국 유럽의 기업이 같은 생산비를 들여 미국이나 아시아에 물건을 팔 때 1년 전보다 10% 이상 낮은 가격으로 팔 수 있다는 얘기다.
유로화 약세의 혜택을 톡톡히 보는 곳은 유럽의 다국적 수출기업들이다. 특히 생산기지를 유럽에 두고 미국이나 아시아로 수출하는 비중이 높은 업체가 승승장구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견고한 품질 경쟁력을 갖춘 유럽 기업들이 유로화 약세로 가격 경쟁력마저 얻다 보니 수출 경쟁력이 비약적으로 높아진 것이다.
최근 미국과 아시아 시장에서 판매량을 부쩍 늘리고 있는 독일의 완성차 업체가 환율의 덕을 보는 대표적 사례다. 벤츠를 생산하는 다임러 그룹의 경우 올 한 해 환율 하락으로 얻게 되는 추가 이익이 6억~7억유로(8,379억~9,775억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생산량의 68%를 유럽 이외 지역으로 수출하는 BMW는 상반기 동안 44억유로(6조 1,449억원)의 영업이익을 냈는데, 환율 덕분에 늘어난 이익은 수억유로에 달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아우디 포르쉐 폴크스바겐 등의 브랜드를 보유한 폴크스바겐 그룹은 유럽 내 판매량이 감소했음에도 북미ㆍ아시아 시장 등에서 가격경쟁력을 높이며 올해 2분기에만 56억 4,000만유로(7조 8,766억원)의 순이익을 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이 경쟁력을 갖고 있는 명품산업도 환율 덕을 보는 분야다. 이탈리아 경제가 과도한 부채로 장기침체를 겪는 와중에도 레이밴 오클리 등을 생산하는 이탈리아 선글래스 업체 룩소티카는 2분기 매출을 15%나 늘렸다. 그 중 절반이 환율 덕분이다. 루이비통 크리스찬디오르 등으로 잘 알려진 프랑스 기업 LVMH는 상반기에만 130억유로(18조 1,554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전년동기보다 26% 급증한 액수다. 카르티에를 생산하는 스위스 업체 리치몬트 역시 상반기 이익이 지난해보다 40% 가량 증가할 전망이다. 스위스프랑이 유로화에 고정(페그)돼 있어 달러ㆍ엔화 대비 가치가 하락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수출 기업이라도 주요 판매처가 유럽인 회사는 유로화 저평가의 이점을 전혀 누리지 못한다. WSJ는 유럽 시장에 안주하다 유럽위기의 직격탄을 고스란히 맞고 있는 대표적 사례로 프랑스 자동차 기업 푸조-시트로엥을 들었다. 유럽 2위 자동차 기업인 푸조-시트로엥은 전통적으로 프랑스나 독일 등 유로존 내 판매비율이 높은데, 최근 실적 부진으로 전체 종업원의 10%를 감원하는 구조조정 계획을 발표했다. 푸조-시트로엥은 상반기 8억 1,900만유로(1조 1,437억원)의 순손실을 기록했다. 같은 프랑스 기업인 르노와 GM 계열의 독일 업체 오펠 역시 과도한 유럽 시장 의존도 때문에 환율 덕을 못 보는 경우다.
벼랑에 몰린 유럽 기업의 입장에서 환율이 일시적으로 가뭄의 단비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지만, 유로존 경제의 기초체력(펀더멘탈)이 받쳐 주지 않는 상황에서 환율효과만으로 불황을 버텨 나가는데는 한계가 있다. 장 미셸 카라용 무디스 수석부회장은 FT에 "유로화 약세가 경기침체 부작용을 일부 상쇄할 수는 있다"면서도 "경제성장 속도가 늦어지면서 전반적인 상황이 유럽 기업들에게 부정적으로 가고 있어 약한 유로화가 만병통치약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영창기자 anti092@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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