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법부 그동안 너무 온정적" "특정인 타깃 입법은 평등 어긋나"
재벌총수의 범법 행위에 대한 처벌은 언제나 솜방망이 논란을 빚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재벌 총수들은 기소가 되어도 보석이든 집행유예든 형기를 채운 예가 없었고, 일정 기간이 지나면 사면복권을 통해 당당히 경영일선으로 복귀했다. 오죽하면 재벌총수의 형량은 '3ㆍ5제(징역 3년 집행유예 5년)'란 말까지 나왔을까.
때문에 정치권에선 현재 경제민주화의 일환으로 기업범죄에 대한 처벌강화를 추진하고 있다. 민주통합당은 재벌 범죄에 대해선 사면권을 제한하는 공약을 제시했고, 새누리당(경제민주화실천모임)에선 집행유예 판결을 원천 봉쇄하는 내용의 법안을 내놓았다. 횡령 배임혐의로 기소된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에 대해 1심 재판부가 징역 4년 선고와 함께 법정 구속한 것도 이 같은 총수처벌강화 분위기를 반영한 것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재계는 '기업인에 대한 역차별'이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김남근 변호사(법무법인 위민)는 "사법부가 그간 재벌 총수에 대해 온정적인 재판을 해 온 게 사실"이라며 정치권의 입법 움직임에 공감을 표시했다. 반면 정태원 변호사(법무법인 에이스)는 "인기영합적인'총수 죽이기'는 바람직하지 않으며 그보다는 재벌의사결정 구조를 개선하는 게 급선무다"고 지적했다.
-기업인 범죄에 대한 처벌강화 취지는 알겠다. 하지만 이것이 경제민주화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인지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 최근 정치권의 입법 움직임을 어떻게 평가하나
김남근: 현재의 법체계에서도 재벌 총수에게 실형을 선고할 수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전례를 보면 일반인들과 달리 재벌 총수에게 관대한 처분이 내려진 걸 부인할 수 없다. 법 자체보다 유독 재벌 총수에게 관용을 베푼 사법부의 잘못이 크다. 경제민주화가 궁극적으로 경제사회적 형평성과 공정성을 높이는 것이라면, 최근 정치권의 입법취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정태원: 재벌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고쳐져야 할 부분도 많다. 하지만 국가경제를 지탱하고 수출을 이끌어 가는 순기능까지 부인할 수 없다. 현실적으로 경제에 미칠 영향도 고려해야 한다. 이런 걸 무시한 채 혁명적인 방법으로 가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국민 정서는 아마도 이 법을 대부분 찬성하는 쪽일 것이다. 하지만 재벌 총수만을 겨냥해 처벌을 강화하는 법안을 만드는 것에 문제는 없을까. 위헌시비도 나올 법 한데.
김남근: 재벌 총수 범죄 처벌 때면 항상 되풀이되는 말이 '국가 경제 타격'이나 '기업 운영 차질 불가피' 같은 것들이다. 하지만 이미 전문경영인 체제로 돼 있어서 총수가 구속된다고 해서 기업이 당장 위기에 빠지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총수 한 명 없다고 흔들리는 기업이라면 그게 더 문제 아닌가. 무엇보다 이 법은 전근대적 인식을 버리고 법 취지에 맞게 사법판단을 정상화 시키자는 데 의의가 크다.
정태원: 아무리 재벌총수가 미워도 특정인을 타깃으로 해 법을 만드는 것은 헌법상 평등 원칙에 맞지 않다. 살인범도 법에 따른 재판을 받는 것처럼, 재벌 총수라고 예외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게 상식이다. 집행유예 사유가 있다면 집행유예를 하는 것이고, 사면사유가 있다면 사면을 하는 것이다. 집행유예든 사면이든 법으로 보장된 제도인데, 특정인만 골라 그것을 못하게 할 수는 없다.
김남근: 사면권 자체를 행사하지 못하게 하면 위헌성이 있겠지만 금지가 아니라 규제, 사면요건을 강화해 권한 행사를 엄격하게 하자는 것이다. 대통령 권한의 전면 제한이 아닌 일부 제한이라 위헌성에 별 문제가 없다고 본다.
-사면과 집행유예를 제한하면 재벌 총수범죄가 실질적으로 줄어들까.
정태원: 현상이 아니라 원인을 치료해야 한다. 기업지배구조와 의사결정구조를 고치는 게 먼저다. 그런 걸 개선하지 않고 눈 앞에 보이는 '총수 엄벌'같은 식으로는 재벌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정치권은 여기에 집중해야 한다고 본다.
김남근: 동감한다. 하지만 집행유예를 받는 사례를 줄이고 사면권을 남발하지 못하게 하면 총수들의 경각심을 일으키는 효과는 클 것이다.
정태원: 판결은 양형위원회 기준에 따라 해야 한다. 더 관대하게 해서도 안되지만, 더 가혹하게 해서도 안 된다.
-총수들이 사법 처리되는 죄목 가운데 횡령과 배임이 가장 많다. 김승연 회장도 그런 경우였다. 그런데 특히 배임죄에 대해선 논란이 있다. 경영을 하다 보면 손해와 실패도 나오기 마련인데, 그런 경영적 판단을 배임죄로 단죄하는 게 옳으냐는 것이다. 재계에선 '배임죄로 걸기 시徘玖?안 걸릴 기업인은 하나도 없다'고까지 말한다.
김남근: 배임죄는 다양하다. 만약 투자 실패로 손실을 입혔다면 법원도 경영적 판단을 존중한다. 투자 실패나 경영적 판단이 아닌, 계열사 적자를 의도적으로 메워준다든지 편법 상속을 한다든지 하는 그릇된 관행은 당연히 법적 책임을 물어야 하는 것 아닌가.
정태원: 동의한다. 미국 판례에 '비즈니스 저지먼트(business judgement)'라는 것이 있듯, 경영 판단의 결과가 나쁘다고 해서 무조건 책임을 지우진 않는다. 우리 법원도 그것은 구분할 것이라고 본다.
-김승연 회장에 대한 법정구속을 어떻게 보나. 재벌총수에게 관대했던 사법부가 변화하는 것으로 봐야 할 까.
정태원: 현 정부 출범 이후 재벌만 성장하고 중소기업은 추락해 양극화가 심해졌다는 비판이 높다. 이런 사회여론과 정치권의 경제민주화 주장이 사법부에도 영향을 미친 것 같다.
김남근: 횡령금액에 비춰보면 오히려 중형에 처해져야 하는데 형량이 낮다고 본다. 재벌에 관대한 처벌을 내린 그간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사법부의 변화라 속단하긴 이르다. 사법부가 처음부터 일반원칙에 의해 엄벌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중요하다.
정태원: 표를 의식한 정치적 행위는 오래갈 수 없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총수 죽이기'가 아니라 재벌 범죄가 일어날 수 없게 하는 구조 개선이 중요하다.
■ 역대 처벌 사례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에 대해 1심 재판부가 집행유예 없는 징역 4년형을 선고하고 법정구속까지 시킨 것은 전례에 비춰볼 때 확실히 이례적이다. 애초 검찰의 구형수위(9년)이 워낙 높아 재계에서도 '집행유예는 힘들 것'이란 시각이 많았고, 대신 '법정구속은 피할 수 있지 않을까'란 기대감 정도 남아있었지만 재판부는 완강한 판결을 내렸다.
사실 역대 기소된 총수 가운데 실형을 산 예는 별로 없다. 형기를 채운 경우는 더더욱 없다. 이와 관련, 대기업 정보제공사이트 '재벌닷컴'이 최근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1990년 이후 자산기준 10대 재벌 총수 가운데 7명이 총22년6개월형의 징역형을 받았지만, 결국은 모두 집행유예를 받았다.
주요 사례를 보면 이건희 삼성 회장은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으로 1996년8월 '징역2년, 집행유예3년'을 받았고 김용철 변호사의 비자금 폭로때는 배임ㆍ조세포탈 혐의로 2009년8월 '징역3년ㆍ집행유예5년'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402일, 139일후 사면 받았다.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도 비자금조성과 횡령 혐의가 적용돼 2008년6월 '징역3년ㆍ집행유예5년'의 판결이 내려졌고 73일 후 사면이 이뤄졌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1조5,000억원대의 분식회계로 2008년5월 '징역3년ㆍ집행유예 5년'을 받았는데 78일 후 사면받았다. 구본무 LG그룹 회장과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은 불법 대선자금 사건으로, 정몽준 전 현대중공업 회장은 주가조작 사건 등으로 조사를 받았지만 징역 이상의 형을 받지는 않았다. 공교롭게도 대부분 총수들이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형을 받아, '총수형량은 3ㆍ5제'란 말까지 등장했다.
집행유예나 사면의 사유는 다양하다. 고령이나 건강악화 이유도 있었고, 국가경제에 기여했다는 공로를 인정한 경우도 있었다. 한 재계관계자는 "총수가 없으면 신규투자나 주요 의사결정이 올스톱되는 것은 사실이다. '기업이 시스템으로 돌아가야지 총수 부재여부에 따라 좌우되는 것은 문제 아니냐'는 지적도 일리는 있지만 어쨌든 그게 우리나라 기업의 현실이다. 총수가 구속되면 기업경영과 투자에 차질을 빚는 건 결코 과장된 논리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유여하를 떠나 일반인보다 관대한 법 적용은 경제민주화 바람을 타고 처벌강화 움직임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와 관련해 여야는 재벌총수처벌 강화법안을 내놓았는데, 새누리당의 '경제민주화실천모임'에선 횡령과 배임액수에 따라 형량을 대폭 강화하는 내용의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개정안을 제시했다. 횡령ㆍ배임액이 ▦5억~50억원이면 징역 7년 이상 ▦50억~300억원이면 10년 이상 ▦300억원 이상은 15년 이상 또는 무기징역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 민주통합당은 사면법 개정안을 내놓았는데, 특정경제범죄처벌법 위반으로 징역형을 받아 3분의2 이상 형기를 채우지 않았거나 집행유예기간 중에 있는 경우 사면을 제한하도록 하고 있다. 재계는 이에 대해 "두 법 대로라면 거의 모든 총수들이 무기징역을 받았어야 했고 끝까지 사면도 불가능했을 것"이라며 '명백한 과잉입법'이라고 반발하는 상태다.
정리=이성기기자 hangi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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