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날 동네 슈퍼에서 저녁때만 되면 약속이라도 한 냥 만나는 선배가 있었다. 몽상을 좋아하던 그 선배가 어느 날 동화를 들려주겠다며 나에게 소주를 한 병 사오라고 했다. 저녁 어스름이 몰려오는 제법 서늘한 늦여름이었다. 그래서 또 한잔 마시게 되는데 입담 좋은 선배는 구라를, 나는 소주값을 내는 방식의 술자리가 그렇게 시작됐다. 선배가 묻는다. "넌 언제부터 얼굴에 그렇게 점이 많았니" 내가 점이 어딨어요, 라는 표정을 지으니. "가서 거울을 좀 봐." 자세히 보니 생각 못했던 곳에 점이 여러 개가 있다. "점이 어떨 때는 많았다가 어떨 때는 줄었다가 하지, 그게 왜 그런지 알아"
얘긴즉슨 이렇다. 어느 마을에 아주 못된 놈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세상이치가 어떻게 된 건지 못된 짓을 할수록 더 많은 재물과 운이 굴러 떨어지고, 그래서 더욱 악행을 일삼는 못된 놈이 있었단다. 그 천하의 못된 놈 에게도 정말 소중한 것이 있었는데, 족보도 없는 똥개새끼였던 거였다. 그런데 이 개가 이유 없이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더니 아무리 손을 써도 회복이 안돼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개는 마을 여기저기를 다니다가 픽 쓰러지기도 하고 어느 땐 돌변해서 아이들을 물어뜯는 공포스러운 짓을 하기도 하지만, 재물과 악행으로 명성을 날리던 주인 덕에 그나마 사건이 스르르 무마되기 일쑤였다. 그런데 이 개가 급기야는 주인을 물어뜯으려 한 것이다.
자기목숨이 위태로워진 주인은 처음으로 하늘에 기도를 드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밤하늘은 검은 자개농처럼 까맣고, 달 하나만 덩그마니 떠 있었단다. 그러니까 세상엔 지구와 해와 달만 있었던 거란다. 하늘은 악인의 진실된 눈물에 응답을 해주셨다. "밤하늘을 보거라." 악인의 눈에 하늘은 여전히 까맣게 보였다. "지금 네가 보는 하늘은 다 거짓이다. 진실을 보고 싶으냐?","개를 살릴 수 만 있다면요. 예전처럼 절 잘 따르는 순종이 된다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눈을 다시 한 번 크게 떠 보거라." 하늘의 응답이 내리자 악인은 자기 눈을 부비며 다시 밤하늘을 바라본다.
그러자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밤하늘에 무수히 많은 별들이 자글자글 빛나고 있었던 것이다. 하늘의 음성이 말한다. "이 별들은 너 같은 악인의 죄 값으로 받은 거란다. 이제 너에게 네가 저지른 죄만큼의 점을 네 얼굴에 새겨 넣겠다. 선행을 할 때마다 점은 사라지고 밤하늘에 별이 될 것이니 네 점이 없어 질 때 까지 선행을 하거라. 그 점이 모두 사라지면 너의 사랑하는 개도 다시 살아날 것이다."
믿을 수 없는 일을 눈과 귀로 들은 악인은 얼굴에 빡빡히 새겨진 자기 점들을 보고 징그럽고 무서워서 전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고 선행을 일삼았으나, 어찌나 죄를 많이 졌든지 죽을 때 까지도 점이 다 사라지지 않고 또 생겨나기까지 했다는 이야기였다. 물론 개는 죽었겠지. 이런 구라를 믿을 수 없겠지만, 선배는 내속을 빤히 들여다보듯 말했다. 네가 백수라서 그나마 점이 없는 거야. 선배의 마무리는 자화자찬으로 끝난다. "나도 원래 점이 무지 많았다고. 이렇게 되기까지 내가 얼마나 많은 선행을 했겠나 생각을 해봐 눈물 나지 않냐." 선배의 말도 되지 않는 귀결로 우리는 헛웃음을 지으며 술판을 접는다. 얘기가 끝나 갈 무렵 제법 많은 별들이 밤하늘에 구석구석 들어서 있었다.
선배의 백수 생활은 다음 달 건설현장의 노동자로 진출하면서 대략 끝이 났다. 난 나대로 꽤 기나긴 시절을 연극 백수로 보냈지만. 지금 광화문 사거리 큰 빌딩 아래 차가운 대리석 위에서 낮 밤을 바꾸어 보루 박스 한 장 위에 누워 있는 실업자들을 보면 한 낯 배부른 소리로 들릴 만큼 세상은 더욱 냉담하고 각박해졌다. 가끔은 그 선배의 동화 같은 얘기가 현실이 되어 저 별만큼이나 많은 선행이 없는 자에게도 공통의 수해가 이뤄지길 비는 수 밖에. 시스템이라는 현대신이 인간의 감정을 조율 할 수 있다면 더욱 더 많은 아름다운 별빛을 바라볼 수 있을 텐데.
박근형 연극연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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