찜질방이 처음 등장한 게 IMF 외환위기 직후인 1990년대 말이다. 도산, 폐업, 실직…, 오그라든 형편이 언제나 펴일지 너나없이 막막했고, 작은 마음 하나 허투루 부릴 여유가 없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찜질방이라니! 집이든 식당이든 널린 게 방이고, 정 원하면 보일러 온도만 몇 도 높이면 되는 일. 창업이 유행이라더니 별 시답잖은 창업도 다 있네…, 하던 이들이 많았다.
누구든 생각할 수 있을 법한 그 아이디어를 정작 결행한 이가 누구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어쨌건 찜질방은 '대박'이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찜질방은 정말 우후죽순처럼 문을 열었고, 전국 어디를 가든 병원 약국은 못 찾아도 찜질방은 눈에 띌 정도였다. 탄생 신화보다 더 놀라운 것은, 정체성과 제 이름의 규정력조차 허물어뜨리며 주변 업종들을 포섭해간 변이의 성장사였다.
2006년 강준만 교수는 <한국생활문화사전> 이라는 책에서 현대인이 열광하는 '멀티 테스킹 미학'의 한 사례로 찜질방을 소개했다. 찜질방이 한국인의 독특한 목욕ㆍ발한(發汗)문화에서 응용돼 나온 뒤 다양한 오락 기능을 덧대가며 종합 놀이공간으로 빠르게 진화했고, 그 결과 현대인의 다양한 욕구를 '원스톱 서비스'로 충족시켜주는 공간으로 자리잡았다는 것이다. 당시에도 찜질방은 이미 PC방, 오락실, 노래방, 수영장, 회의실, 식당, 영화방 등등을 제 안에 아우른 실내 여가문화의 총화 공간으로 각광받았다. 한창때는 기업들이 회의 장소로 찜질방을 찾고 증권사 투자설명회가 찜질방에서 열리기도 했다고 한다. 2006년 통계청은 소비자물가 산출 대표품목으로 찜질방 요금을 포함시켰다. 한국생활문화사전>
진화는 도태를 딛고서야 서는 단어다. 찜질방 멀티화는 업소간의 치열한 시설ㆍ규모ㆍ아이디어 경쟁의 과정이자 결과였다. 수많은 군소 찜질방들이 얼마 전 동네 목욕탕이 맞닥뜨렸던 같은 운명 앞에 주저앉아야 했고, 살아남은 거인들은 더 광역화한 시장을 놓고 새로운 경쟁을 벌였다. 지금 널찍한 찜질방들이 구현하고 있는 멀티의 미학, 예컨대 대형 수영장이나 헬스클럽 뺨치게 구색을 갖춘 헬스방, 전문업소 못잖은 장비 업그레이드 주기를 자랑하는 노래방 dvd방을 위시한 각종 '방'들은 저 살벌했던 찜질방 전국시대의 상흔이자, 훈장이다. 그리고, 경쟁의 체험은 찜질방 공간의 탄력성을 생존의 본능처럼 각인시켰다. 노래방이 언제 독서실이나 새로운 무슨 '방'으로 변형될지 모른다.
초창기만은 못하지만 찜질방은 여전히 마니아층을 거느리며 지난 염천(炎天)에도 실속 피서의 대안 공간으로 노소의 사랑을 받았다. 가장 인기를 끈 시설은 냉장고 속 같은 '얼음방'과 거실 대형 에어컨 앞자리, 그리고 수건 이불로 토막잠 정도는 잘 수 있을 만큼 서늘했던 '가을방'(20도 내외)이었다. 그 방도 두어 달 뒤면 예전의 황토방(60도)으로 문패를 바꿔 달게 될 것이다.
주말 새벽 3시, 서울 송파구의 한 대형 찜질방. 입실하는 이도 드물고, 코 고는 소리나 불편한 잠자리에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던 이들도 망설임 끝에 퇴실했을 시각. 70평 남짓의 거실에는 줄잡아 100여 명의 손님이 에어컨 주변에 모여 있었다. 초저녁부터 몰려 다니며 어른들의 핀잔을 듣던 10대들도 안 보인다. 역시 귀가했거나, 공간 안 어딘가에 터를 잡고 있을 가족들 틈으로 끼어들었을 것이다. 대형 TV화면은 그날 치의 가장 화려한 올림픽 장면을 전하고 있었지만 누군가가 소리는 죽여놓은 뒤였고, 화면 앞을 지키고 있던 몇몇도 함성 빠진 승리의 드라마에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구석 자리는 대개 젊은 연인들 차지. 소꿉놀이 같은 이른 '동침'의 스릴에 잠들지 못하는 눈치들이었다.
구조적으로 보자면 찜질방은 일상적인 주거공간을 확장하거나 살짝 변형한 형태다. 거실을 중심으로 여러 개의 방이 있고, 씻고 옷 갈아입고 먹는 곳이 있다. 노래방이나 PC방 같은 저마다의 다용도 공간은 잠깐씩 머무는 부수적 공간일 뿐이다. 찜질방에서 우리가 누리는 바도 집에서의 그것과 본질적으로는 같다. 받는 것 없이 웃어주는 일 없는 세상을 향해 먼저 억지로 미소 짓느라 힘겨웠던 볼 근육도 풀고, 멍하니 아늑하게, 몸도 마음도 풀어놓고 싶은 거다. 매정한 세상은 노동이 강제하는 경직된 자세나 상하관계일 수도 있고, 선풍기나 기름보일러로는 감당이 안 되는 더위나 추위일 때도 있다.
그런 이들에게 찜질방은 긴장 없이 널브러지는 공간이다. 없는 게 없다는 곳이지만, 책상이나 의자 같은 딱딱한 사무용품은 없다. 허리를 곧추세울 필요가 없어서가 아니라 경쟁과 긴장의 시간에 저항하자는 것이 그 공간의 의도나 목적인지 모른다. 한 아름도 넘는 육중한 등받이용 통나무들이 놓인 찜질방도 있지만, 그건 공간을 사적으로 구획하는 최소한의 경계이거나 잠깐씩 비스듬히 기댈 수 있는 도구일 뿐이다. 찜질방에서 우리는 앉지 않고 퍼질러 앉고, 눕지 않고 널브러진다.
격식을 갖춘 파티가 식상해진 서양인들이 가끔 즐긴다는 파자마 파티도 동네 아주머니들이나 또래 친구들의 찜질복 수다 파티의 자유로움을 넘볼 수 없다. 파자마에는 각자의 개성과 감각이 시퍼렇게 살아있지만 유니폼으로서의 찜질복은 그것들을 누그러뜨린다. 찜질방 조도의 어슴푸레함처럼 찜질복의 넉넉한 품이 감싸주는 것은 몸매만은 아니어서, 그 안에서 우리의 날 선 프라이버시는 둔하고 너그러워진다. 그래서, 아직은 조심스러운 애인 앞에서 침 흘리며 잠 자고 코 골고, 심지어 그렇게 잠든 자신들의 모습을 타인들에게 노출(?)하면서도 대수롭잖게 '뭐 어때' 할 수 있는 것이다.
개별성의 둔화는 세대간에도 구현돼 찜질방만큼 다양한 연령층이 문화적으로 별 불화 없이, 공간과 일상을 공유하며 공존하는 곳도 드물다. 억제하기 힘든 청춘들의 달뜬 몸짓이 가끔 어르신들의 눈살을 찌푸리게도 하지만, 그것도 찜질방 문화가 성숙해지면서 초기만큼 심하지 않고, 또 좀 심해도 선만 넘지 않으면 어르신들이 너그럽게 눈감아 주는 공간이 됐다.
찜질방을 널브러짐의 공간이라 했지만, 그렇다고 무위의 휴식공간이라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거기서 우리는 알게 모르게 쉼 없이 뭔가를 하며 즐긴다. 거기서 우리는 인체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 온도에 가까운 열기와 냉기를 자유롭게 만끽할 수 있지만 몸이 딱 원하는 온ㆍ습도를 선택할 수는 없다. 그래서 근사치의 방들은 찾아 이 방 저 방 오가기도 하고, 그게 귀찮으면 여기저기 눈길로 배회하기도 한다. 그래도 정 심심하면 냉식혜 한 잔을 시켜놓고 맥반석 계란을 깐다. 그것은 허기와는 별로 상관이 없다. 허기를 달래려면 조랭이 미역국이 제격이다. 찜질방에서는 별 매개 없이도, 일상이 오락이 되고 생활이 유희가 된다.
멀티테스킹 공간으로서의 찜질방이지만, 원형질은 역시 온기(溫氣)다. 외환위기의 한기(寒氣)를 막아준 것이, 당시 관료들이 생존의 구호처럼 읊던 '글로벌 스탠다드'나 제2의 국채보상운동이라던 금반지 내다팔기가 아니라, 찜질방의 온기였던 처음 그 때처럼, 체온에 육박하는 세상 바깥의 무더위에도 40~70도의 다양한 열기를 품은 참숯방 황토방 자수정방에 인적이 끊기는 경우는 없다. 숨이 턱턱 막히는 열기 속에서 찜질복이 축축해지도록 땀을 흘리면서도, 맘만 먹으면 언제든 30도의 서늘함(?) 속으로, 소름 돋는 얼음방 안으로 피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뜨거운 방에 모여 앉아 인내력 대결을 벌이다가 마지막 한 명의 승자를 못 나오게 막고선 좋아 죽는 악동들도 있다. 찜통 안 승자의 비명과 방 바깥 패자들의 함성이 거기선 유쾌하게 어우러진다.
그 떠들썩한, 유희의 바탕에 우리들 유전자 속에 내장된 온돌의 추억, 구들 온기에 대한 어렴풋한 그리움이 있는 건 아닌지. 초저녁 아궁이에 피운 불기가 온돌방에 고루 퍼지려면 밤 10시는 지나야 한다. 윗목은 여전히 식은 채여도 아랫목은 쩔쩔 끓는다. 콩기름 먹인 한지 장판이 끄무레하게 눌어 부서질 지경이지만, 아직 잠들기 전의 어중간한 밤의 잠깐 동안 고단한 팔다리와 쑤시는 허리를 대고 '지지던' 노년의 기억- 경험과 무관하게 유전된 기억-이 우리에게도 내장돼 있는 것은 아닌지. 두툼한 현무함 판석이 오래 머금었다가 토해내던 그 묵직한 열기와는 다르지만, 당장은 엉덩이 데일 듯 뜨거워도 새벽이 깊어지면 서서히 식어갈 것임을 알기에 더 애틋했던 그 열기와도 다르지만, 찜질방의 온기는 적삼목이나 히노키 사우나와는 다른, 정서적 질감의 온기를 우리에게 선사한다.
특유의 부산스러움과 낯선 잠자리의 불편함으로 찜질방에 안 좋은 인상을 품고 있는 어떤 이는 그 공간의 새벽 3시 풍경을 두고 '이재민 쉼터 같더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그 심란하기만 하던 공간이 생각날 때가 있더라고 했다. 그래서 누가 권유라도 하면 못 이긴 척 다시 따라 나서고 싶어질 때가 있더라고, 곡절은 모르겠고 그래서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 공간이 그리워지더라고 그는 실토(?)했다. 그것도 어쩌면 온기의 추억, 그 온기 안에 한없이 널브러지고 싶은 이완의 욕망 때문일까. 심란하고 어수선한 게 싫어 서둘러 샤워하고 나서더라도, 출입문을 열자마자 두고 온 그 온기가, 그 냉기가, 난민촌 같은 그 널브러진 군상들의 풍경이 그리워지는 까닭은 뭘까.
최윤필 선임기자 proos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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