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기업 사장 김모(65)씨는 오디오 부품 제조로 큰 돈을 벌었다. 전국 각지에 1,000억원대 부동산을 보유하고, 금융회사 3곳에 각 200억원씩 맡겨두고 있으니 남부러울 게 없다. 그런 김씨가 최근 세무컨설팅을 받다가 걱정이 생겼다.
하향세로 접어든 사업을 일부 줄여야 하고 그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부동산 처리도 골칫거리다. 아들(35)은 제조업보다 외식업을 하고 싶어하는 눈치라 가업승계도 뜻대로 안 풀린다. 증여를 하려 해도 적절한 절세 방안이 떠오르지 않고, 힘들게 모은 재산의 일부는 공익을 위해 기부하고 싶지만 방법을 모른다. 당나라 한산의 시마냥 "재물이 많으니 근심이 쌓이는" 형국이다.
고심 끝에 그는 거래하는 금융회사의 프라이빗뱅킹(PB) 점포를 찾아가 도움을 구했다. 하지만 종합적 해법보다 단편적인 절세 정보나 투자 조언 정도에 그쳤다. 주변에 물어보니 비슷한 처지의 부자들이 한둘이 아니다.
부자들의 관심은 부를 계속 늘리는 것보다 이뤄놓은 부를 자손들이 잘 지켜나가는 데 쏠려있다.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부자 3대 못 간다'는 옛말이 점점 더 절실하게 와 닿는다. 게다가 성공한 만큼 주변의 평판도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다.
이에 발맞춰 금융 서비스가 진화하고 있다. 증권사들이 올 들어 앞다퉈 선보이고 있는 '패밀리 오피스'서비스가 그렇다. 가문의 자산관리와 기업 경영컨설팅을 접목한 것으로 미래에셋증권이 처음으로 2월 서비스를 시작하자, 삼성 우리투자 신영 대신증권 등도 비슷한 서비스를 내놓고 있다.
패밀리 오피스는 기존 PB 분야에선 흩어져있던 투자 세무 부동산 상속 등 자산관리 서비스를 한데 모으고, 경영관리 기업복지 기업공개(IPO) 채권발행 등 기업경영 전반도 책임지고 대행하겠다고 약속한다. 고객이 경영하는 기업의 임직원을 대상으로 한 연말정산 교육까지 챙긴다. 과거 전담 PB 한 명이 제공하던 서비스를 변호사, 세무사, 회계사, 노무사, 부동산 전문가 등으로 팀을 꾸려 진행한다. 증권사들이 유럽 상류가문의 대소사를 챙기던 집사 역할을 자처하고 나선 셈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삼성증권 등은 제공 서비스 중 '기부 컨설팅'을 강조하고 있다. 자칫 "금융회사가 부자 세금 줄이기를 조장하는 것 아니냐"는 부정적 인식을 줄이고, 부자들의 사회 기여를 유도하려는 노력으로 비춰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국내 금융회사들이 내세우는 패밀리 오피스는 1911년 미국 석유 왕 록펠러 가문이 처음 세운 사적(私的) 전문가 조직에서 빌려온 개념이다. 전세계에 1만개 정도가 활동하는 걸로 추산되지만 국내엔 관련 법규가 없어 부자나 기업이 공식적으로 별도의 패밀리 오피스를 설립할 수 없다. 대기업 사주들의 경우는 비서실 등이 사실상 패밀리 오피스 역할을 맡기도 한다.
하지만 알짜배기 중소기업을 운영하거나 부동산 투자 등으로 거액을 번 자산가들은 마땅한 방법을 찾지 못하기 때문에 패밀리 오피스에 대한 수요는 상당히 많은 것으로 금융권은 판단하고 있다. 증권사 등의 패밀리 오피스 서비스는 이런 틈새를 노린 전략이다. 당연히 관련 서비스에 대한 직접적인 보수나 수수료가 없어 당장의 수익모델이 될 수 없지만 고액자산가를 유치하려는 장기 포석 차원에서 진행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패밀리 오피스가 부자 절세뿐 아니라 기부 활성화 등 사회에 긍정적 역할도 적지 않기 때문에 외국처럼 관련 서비스를 통해 금융회사가 수익을 창출할 수 있도록 제도를 바꾸고, 중산층을 겨냥한 상품도 출시하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패밀리 오피스(Family Office)
19세기 후반부터 로스 차일드 등 유럽과 미국의 부자 가문들이 창업주를 기리기 위해 가계 철학 수립, 자산운용과 종합적인 가문 관리, 세대간 부의 이전 및 승계, 사회공헌 등을 목적으로 설립한 전문가 조직. 기록상 패밀리 오피스 1호는 1911년 록펠러 가문이 세웠다. 현재 미국에 4,000개, 세계적으로 1만개 정도인 것으로 추산된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상대적으로 안전하고 신흥 부호가 많은 싱가포르 홍콩 등 아시아로 옮겨오는 추세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법적 설립 근거가 없어 대기업의 본부 조직이나 금융회사의 VIP 서비스가 일부 기능을 대신하고 있다.
고찬유기자 jutd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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