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사람에게 가족은 때론 약보다 더 절실한 존재다. 가족이 있기에 아픔을 견디고 병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오랫동안 지독한 피부병 건선과 싸워온 아내 김희순(가명)씨가 그 모든 과정을 함께 감내해준 남편에게 편지로 진심을 전했다. 남편 정만길(가명)씨는 "당신이 웃을 수 있기만 바랄 뿐"이라고 답했다.
아내가 남편에게
"당신의 권유로 새로 시작한 치료를 세 번째 받고 돌아온 초여름 오후, 당신이 깜짝 선물을 내밀었죠. 이젠 이런 옷도 입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화사한 반소매 원피스를. 여고시절 건선이 온몸을 덮기 시작하면서 50대인 지금까지 사계절 내내 긴 소매 긴 바지만 입어야 했던 내가 처음으로 팔과 종아리가 보이는 원피스를 입었어요.
지난해까지만 해도 열대야가 기승을 부리는 한여름에도 온몸에 연고를 바르고 비닐랩으로 감싼 채 누워야 했죠. 잠결에 피부를 긁어 증상이 악화할까 봐 양손을 묶고 있는 내 모습이 안쓰러워 당신은 조용히 등을 돌려 눕곤 했어요. 친오빠도 보기 흉하다고 고개를 돌리는 내 몸에 매일 연고를 발라준 사람도 당신이었지요.
연애시절 당신이 건선이라는 내 평생의 짐을 선뜻 함께 짊어지겠다고 했던 때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요. 당신을 만나기 전 난 결혼은커녕 연애도 꿈꾸지 못했으니까요. 20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그 약속 지켜줘서 고마워요.
끝이 안 보이는 치료는 당신에게도 고통이었죠. 하루가 멀다 하고 병원을 들락거리고, 걸어 다니는 곳마다 피부 각질이 떨어진 탓에 친척도 친구도 마음 편히 만날 수 없었어요. 독한 약을 밥보다 더 많이 먹어야 했던 나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원하던 아이도 갖지 못한 미안함은 어떻게 말로 다 할 수 있을까요.
건선은 내게 말 그대로 형벌이었어요. 그 모진 형벌을 견딜 수 있었던 건 항상 곁에 있어준 당신 덕분이지요. 새 치료를 시작하면서 이젠 몸에 연고 말고 간단히 수분로션 정도만 바르고도 일상생활을 할 수 있게 됐어요. 올 여름이 가기 전에 당신이 선물해준 원피스를 입고 사랑하는 당신과 함께 처음으로 바닷가에 가보고 싶어요."
남편이 아내에게
"명절 전날 제사음식 준비하느라 허리 한번 못 펴고 일했으면서 이불에 각질이 떨어지면 시댁 식구들이 싫어할까 봐 거실 소파에서 쭈그려 앉아 새우잠을 자던 당신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해요. 낮에도 집안에 각질이 떨어져 있으면 친척들이 싫어한다고 바닥 청소까지 수시로 했지요. 그런 당신을 보면 안쓰럽고, 마음이 짠하고….
하루는 공중목욕탕에 다녀온 당신이 "글쎄, 목욕탕 주인 아줌마가 다른 손님들한테 피부병 전염되면 어떡하냐고 다음부턴 안 왔으면 좋겠다고 하대요"라고 했죠. 웃으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 얘기했지만 난 알고 있었어요. 그 말이 당신에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됐는지. 그리고 연애시절 당신에게 비슷한 질문을 했던 내 모습이 떠오르면서 얼마나 미안했는지 알아요? 그 때도 당신은 "이 병은 옮는 게 아니에요"라고 씩씩하게 알려줬었지요.
당신은 당신 때문에 남들 다 가는 여행 한번 제대로 못 간다고 미안해하지만, 전혀 그러지 않아도 돼요. 난 당신과 함께 있다면 그 곳이 병원이든 바닷가든 행복하니까. 그저 당신이 하루빨리 고통 없이 매일 웃으며 지냈으면 좋겠다는 마음뿐이에요.
병원 치료 때문에 다니던 직장을 그만둔 뒤에도 조금이라도 병원비 보탠다며 힘든 몸을 이끌고 출퇴근시간이 비교적 자유로운 식당에 나가 일을 시작했을 땐 되레 내가 못난 남편 같다는 생각도 들었죠. 그렇게 스스로 약해질 때마다 내가 강해져야 당신이 나를 믿고 의지할 수 있을 거라고 마음을 다잡곤 했어요.
그래도 새로 시작한 치료 덕분에 요즘은 병원에 전만큼 자주 가지 않고도 증상이 좋아진 것 같아요. 당신도 더 많이 웃고. 지금까지 씩씩하게 지내온 것처럼 우리 건선에 지지 말고 계속 즐겁게 살아요. 사랑합니다, 희순씨.
■ 면역체계 이상탓 각질세포 빨리 성장… 국민의 1%가 앓아
사람의 피부 가장 바깥쪽은 얇은 각질로 덮여 있다. 수분 증발을 막고 유해물질로부터 피부를 보호해주기 위해서다. 건강한 사람은 피부 속에 있던 각질형성세포가 각질이 돼 표피로 올라와 떨어질 때까지 28~30일이 걸린다.
그러나 건선 환자는 각질형성세포가 3~6일만에 각질로 자라면서 피부에 두텁게 쌓인다. 면역체계 이상 때문이다. 면역세포가 만드는 물질인 인터류킨(IL)-12와 IL-23이 활발히 활동하면서 각질형성세포 분화를 촉진한다고 알려져 있다. 또 면역반응이 지나치게 일어나 피부에 딱지와 염증이 생기면?붉어진다. 피부가 심하게 변하니 환자는 사회생활에 지장을 받고 우울증을 겪기도 한다. 초기엔 습진이나 알레르기와 비슷해 보여 확실히 진단하려면 조직검사를 해야 한다. 우리나라 인구의 약 1%가 건선을 앓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전체 피부의 10% 미만에서 건선이 생기면 주로 연고를 발라 치료한다. 10% 이상에서 생기면 각질형성세포가 자라는 속도나 면역체계를 억제하는 약, 자외선 치료법 등을 써왔다. 최근에는 면역체계 전반에 영향을 미쳐 부작용이 생기는 기존 약과 달리 건선의 원인인 IL-12와 IL-23의 활동만을 정확히 방해하는 치료제가 나왔다. 편지의 주인공 김희순씨는 지난해 국내에 출시된 이 치료제를 쓴 뒤 팔다리가 드러나는 옷을 입고 외출하는 등 일상생활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
정리=임소형기자 precar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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