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싸이의 '강남 스타일'이란 뮤직비디오가 히트를 치고 있다. 예전의 마카레나 춤 열풍만큼 강할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국내용' 가수로 치부되던 '싸이'가 유튜브를 타고 '글로벌 한류스타'로 뜨고 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1970년대 후반부터 우리 사회에서 '강남'은 부와 명예 뿐만 아니라 그런 선망되는 가치들이 사교육을 통해서 재생산되는, 그렇지만 아무나 쉽사리 진입할 수없는 특정 지역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그 비디오에서 강남은 싸이 스스로도 표현했듯 '한심'하고 '저속'한 퍼포먼스의 배경일 뿐이다.
싸이는 마천루와 고급 수입차가 상징하는 엄숙함과 물질주의를 조롱이나 하듯 강남의 어느 거리에서도, 주차장과 놀이 공원에서도, 심지어 지하철에서도 그의 노골적인 섹스어필이 담긴 직설적인 가사를 던지며 궁둥이와 허벅지를 흔들어댄다. 마치 도심을 미친 듯 뛰어다니는 한 마리의 말처럼. 그래서인지 그의 춤이름도 '말춤'이다.
다른 한편으로 '강남스타일'은 '오빠'의 매력을 강조하기 위한 수식어 또는 술어라는 점에서, 일견 여전히 실재하는 '강남'의 상징권력을 인정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노래 가사를 관통하는 자기애와 욕망은 '강남'을 갖다 붙임으로써 자기 풍자와 조롱의 절정으로 줄달음친다. 청담동 거리를 말춤추며 뛰어다니는 그를 보며 박장대소하는 거리의 사람들. 그들의 시선은 바로 뮤직비디오를 보며 웃음을 터뜨리는 청중의 그것이기도 하다.
싸이의 '강남스타일'은 이제 대구와 홍대 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패러디로 제작되고 있다. 패러디라는 장르는 원작을 모사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살짝 비트는 데서 그 매력을 찾을 수 있다. 패러디야말로 가장 참여적인 피드백 방식이며, 유튜브라는 글로벌 네트워크를 타고 이러한 패러디가 넘쳐난다는 것은 바로 우리 문화의 확산력이 그만큼 커졌다는 증거가 된다.
동시에 패러디의 확산은 싸이가 던져주는 문제의식에 대한 강한 공감의 표출이기도 하다. 무덥고 숨막힐듯한 일상의 공간에서 모든 것을 다 잊고 섹시한 그녀, 멋진 그이와 댄스를 추고 싶다는 욕망. 그것이 실현되는 순간은 일탈이 아니라 차라리 탈출에 가깝다.
10년 전 내가 한국을 떠날 때의 강남과 최근의 강남은 판이하게 달라졌다. 세계 어느 도시 못지않은 도회적 풍경과 세계 유수의 브랜드샵이 넘쳐나는 물질의 향연. '강남스타일'은 '뉴요커'나 '파리지엔'의 스타일보다 이제 더 이상 촌스럽지 않다. 하지만 그곳을 떠나 '기러기'가 되어 미국으로 피신온 사람들이 묘사하는 강남은 결코 이상향만은 아니었다. 모두가 가고 싶어하는 듯 보이지만, 정작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행복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는 고백들. 그들은 경쟁의 피곤함과 경제적인 빡빡함, 그리고 없어도 있는 척해야 하는 이중성에 몸서리친다. 그들의 고백에는 아이들을 사교육의 낭떠러지까지 몰아붙여야 하는 죄책감도 묻어있었다. 특히 부의 집중이 노골적인 세상에서 양지에 서있지 못한 사람들에게 강남은 더 이상 행복한 낙원이 아니었다.
어느 사회에나 많은 이들이 닮고 싶어하고 소속되고 싶어하는 준거집단은 있기 마련이다. 고위 공무원과 전문직, 부호들이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모여들어 사는 곳. 하지만 강남의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직장 때문에, 교육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 곳의 한 켠을 차지한 사람들도 많이 있다. 강남에 살아서 행복하거나 불행하다기 보다는 어떤 마음으로 사느냐에 답이 있는지도 모른다.
싸이의 처절한 몸부림은 우리에게 쾌락에의 몰입만을 전하는 것이 아니다. '강남' 스타일이 되기 위해 모든걸 다 던져야 하는 스스로에 대한 냉소이자 조롱이다. 너무 확대 해석한 것이 아니냐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그러기를 바랄 뿐'이라고 대답하고 싶다. 지금 싸이의 말춤을 추며 '오빤 강남스타일'을 외치고 있는 당신의 모습은 어느 한가지로 규정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무슨 스타일을 거론하며 시시닥거리는 모습 그 자체는 무언가 사회적 의미를 담고 있다.
김장현 미국 하와이대 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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