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이 나왔던 곳이 여긴가?" 원효대교 남단 여의도 한강공원을 걷던 영화사 청어람의 최용배 대표가 두리번거린다. 영화가 개봉한 지 6년, 기억이 희미해졌을 법도 한데 정확한 위치를 기억해낸다. 오른쪽 어깨 위엔 원효대교 남쪽 끝자락이 걸치고, 강 건너에는 남산 N서울타워가 보이는 한강 둔치. 며칠 전만 해도 녹조 현상으로 죽은 물고기가 배를 내놓고 떠내려갔던 현장이지만 비가 내리면서 물빛도 어느 정도 정상을 되찾았다. 평일 오후 무더위를 피해 강바람의 여유를 즐기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확실히 그때보단 한강이 더 유원지 같아졌어요." 화창하던 하늘이 갑자기 흐려지더니 비가 쏟아 내릴 기세다. 선착장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서둘러 유람선에 오른다.
원효대교 남단 여의도 한강공원은 영화 '괴물'의 마지막 시퀀스를 찍었던 장소다. 시위대와 경찰이 대치하고 강두(송강호)와 남일(박해일), 남주(배두나)가 강두의 딸 현서(고아성)를 구하기 위해 괴물과 사투를 벌이던 그곳. 최 대표는 "한강이 맑은 날엔 유원지 같아 보여도 오늘처럼 잔뜩 흐리거나 비가 내리면 괴물이 나올 것처럼 을씨년스럽게 보이기도 한다"고 했다. 숨 막힐 것 같은 도심 속에서 탁 트인 풍광을 선사하던 한강이 탁해진 수질 탓인지 이날 따라 유난히 침울해 보였다. 서울이 곪으면 곧바로 고름을 터트리곤 했던 것이 바로 한강이다.
작품의 출발점이 된 한강
영화 '괴물'의 탄생은 25년 전인 198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3이던 봉준호 감독의 소일거리는 창 밖을 우두커니 바라보는 것이었다. 하루는 잠실 장미 아파트 13층 방에서 창 밖을 보다가 잠실대교 교각을 기어가는 괴물을 보게 됐다. 정말 괴물이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영화감독이 꿈이었던 그는 그날의 기억을 꼭 영화로 만들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한다.
"2002년 3월이었을 겁니다. 제가 시네마서비스를 나와 청어람을 창립한 다음해였는데 봉준호 감독이 한강에 네스호의 괴물을 합성한 사진을 들고 와 한강에서 괴물이 나오는 영화를 찍고 싶다고 했어요. 처음부터 한강이 배경이었던 거죠.'플란다스의 개'를 보고 봉 감독의 연출력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괴물을 사실적으로만 표현해낼 수 있다면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봉 감독의 두 번째 영화 '살인의 추억' 촬영이 끝나고 2003년 1월 '괴물' 제작부가 꾸려졌다. '살인의 추억'이 500만 관객을 모으는 성공을 거두면서 '괴물' 제작에도 청신호가 켜졌다. 송강호 박해일 배두나 변희봉 등 출연진도 화려했다. 그러나 아무도 영화에 투자하려 하지 않았다. 최 대표는 "할리우드처럼 괴물을 표현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 투자하려는 회사가 없었다"며 "일본의 한 회사로부터 150만달러를 투자 받고 350만달러의 판권을 미리 팔았는데도 국내 투자사들은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했다.
제작비 조달은 끊임없는 난관의 연속이었지만 제작은 차근차근 진행됐다. '한강에 출몰한 괴물'이라는 설정에서 출발했기에 로케이션 헌팅은 어렵지 않았다. 다만 한강이라는 정해진 공간 안에서 최대한 꼼꼼하게 촬영장소를 찾아야 했다. 한강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차를 이용할 순 없었다. 봉 감독은 시나리오를 함께 쓴 연출부 하준원씨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강남, 강북으로 나눠 한강 곳곳을 수없이 반복해서 샅샅이 뒤지고 또 뒤졌다. 한강과 연결된 하수구의 악취를 뒤집어쓴 것만도 여러 번이었다. 시나리오와 콘티는 한강의 교각, 다리, 둔치를 정확히 파악한 뒤 완성됐다.
영화 속에서 괴물이 사는 곳은 원효대교 북단의 하수구다. 서울의 중심인데다 영화 속에서 포름알데히드를 한강으로 버려 괴생명체가 나타나게 만든 용산 미군기지가 가깝다. 봉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1년간 한강 다리를 헤매다 원효대교 북단에서 괴물의 은신처처럼 생긴 대형 원형 하수구를 발견했을 때 느낀 엄청난 감격과 흥분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원효대교 북단에서 태어난 괴물은 결국 남단에서 최후를 맞이한다.
한국 사회 부조리에 대한 상징
'괴물'에 나오는 장소들은 '봉테일'(봉준호+디테일)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봉준호 감독의 세심함이 집약된 결과물들이다. 영화 도입부 낚시꾼들이 등장하는 잠실대교 북단, 가족의 매점이 있는 서강대교 남단 한강공원, 배두나가 활을 들고 달리는 성산대교 철망과 한강철교 북단 아래 통로, 가족들이 헤매고 다니던 옥수 빗물펌프장과 중랑천 철문 우수구 등 한강과 한강 인근의 낯선 풍경이 영화에 담겼다. 최 대표는 "제작 전 봉 감독이 갖가지 각도에서 찍은 한강과 다리, 교각의 사진들을 들고 왔을 때 우리가 일상에서 보기 힘든 한강의 시각적 신선함을 느낄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봉준호 감독은 '괴물'을 현실적인 드라마로 만들고 싶었다. 미군이 한강에 버린 화학물질이 괴물을 만들고, 괴물이 나타나 소녀를 하수구로 데려가고, 가족이 괴물에 맞서 싸우는 것 모두 "현실에서 일어나는 실제 사건"처럼 보이게 하는 게 그의 목표였다. 한강은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사실적으로 보이게 하고, 현실의 공간을 낯설게 만드는 중요한 장치다. 봉 감독은 일상적으로 보게 되는 한강이 낯선 곳으로 보이길 바랐다. 그는 "한강은 스펙터클의 보고"라며 "강 주변에 기이하기까지 한 시멘트와 교각, 다리들이 한강처럼 많은 경우도 드물다"고 말하기도 했다.
'괴물'은 한국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상징이기도 하다. 한강을 오염시키는 미군, 미국에 끌려가는 한국 정부, 이를 바라보는 시민들의 불안과 공포가 형상화된 것이 괴물이다. 최 대표는 "한강의 아름답고 행복한 공간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사회의 어두운 면을 드러내는 공간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괴물'이 한강의 유려한 외관에 무심한 반면 눈에 잘 띄지 않는 하부 구조에 유난히 집착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의미심장하다.
자연 하천의 의미를 상실한 한강의 역사 자체도 크게 보면 경제 개발의 이면에 담긴 부조리의 산물이다. 지난 100년 한강은 끊임없이 성형을 거치며 자연보다 인공의 모습이 강한 공간으로 변했다. 1900년 한강철교가 처음 준공된 이래 일산대교에서 팔당대교까지 서른한 개의 다리가 세워졌고, 끊임없는 공사를 통해 대량의 콘크리트와 철근이 한강 주변을 에워쌌다. 1970년대 불어 닥친 강남 개발 붐은 다리의 수를 급속도로 늘렸고, 1980년대의 경제 성장은 홍수 방제 시설과 한강 공원 조성 등으로 한강 주변부의 얼굴을 바꿔나갔다.
강두 가족이 운영하는 매점은 한국 사회가 한강에 가한 수술의 또 다른 흉터다. 최 대표는 한강공원의 매점을 취재했던 봉 감독에 대한 일화를 소개했다. "봉준호 감독은 매점 하나도 허투루 쓰지 않았습니다. 촬영을 준비하며 많은 취재를 했던 거죠. 예전에 한강에 있던 모래를 갖다가 지은 게 상계동의 아파트라고 합니다. 상계동의 서민들을 내몰면서 준 게 한강공원의 매점 운영권이었다고 하더군요." 영화에는 설명되지 않지만 강두 가족은 한강 개발과 도시 재개발로 갈 곳을 잃은 서민들의 단면과 다름 없는 셈이다.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한강은 지금도 시름시름 앓고 있다. 최 대표는 "'한강의 기적'이라는 표현을 긍정적으로만 보는 게 맞는 건가?"라고 반문했다. 경제 성장은 기적을 이뤘을지 몰라도 한강은 많은 걸 포기하고 희생해야 했다. 최근 한강 생태계를 위협하고 먹을 물까지 걱정하게 만들었던 녹조 현상은 한강 훼손과 주변 개발에 따라 흘러온 오염물질이 만들어낸 결과다. 반포대교 남단에서 수개월째 흉물로 방치된 채 버티고 있는 세빛둥둥섬 역시 서울시민의 혈세를 잡아먹고 있는 또 다른 '괴물'의 형상이다.
'괴물2' 한강에서 도심까지
'괴물'은 아직까지 한국 영화 최고의 흥행작으로 남아 있다. 2006년 7월 27일 개봉한 이 영화는 9일 만에 500만 관객을 돌파하고 21일 만에 1,000만명을 넘어서 최종적으로 1,301만명을 기록했다. 영화 개봉 직전까지 제작비를 구하러 다녀야 했던 최 대표는 '괴물'이 칸영화제에서 상영됐을 때만 해도 반응이 별로 좋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당시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1,000만 돌파에 대한 자신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칸영화제에 온 누구도 '괴물'이 크게 성공할 것이라고 예견하지 못했죠. 한국에 돌아와 언론시사를 한 뒤에야 좋은 평가가 나오기 시작했어요. 시간이 지나도 가치가 퇴색하지 않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는데 '괴물'이 그런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강풀 작가 원작의 '26년'을 촬영 중인 그는 내년 초부턴 '괴물2' 촬영도 시작할 예정이다.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적지 않은 비용이 지출됐지만 "1편의 명성에 미치지 못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진 않다는 생각"에 오랜 준비 기간을 가졌다. CF 감독 출신인 박명천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컴퓨터 그래픽과 시각효과는 국내 업체가 맡는다. 본 촬영에 앞서 만든 파일럿 단편에는 1편보다 훨씬 역동적이고 사실적인 괴물의 모습이 담겨 있다.
"1편에선 도심 액션 장면을 찍지 못했는데 2편에선 한강뿐만 아니라 도심에 출몰한 괴물의 모습까지 그려내는 등 장르 영화의 성격을 한층 강화할 예정입니다. 1편을 3D로 변환해 보니 한강과 다리, 교각, 괴물 등 3D로 표현하기 좋은 요소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됐어? '괴물2'도 3D 제작을 검토 중입니다."
고경석기자
■ 최용배 청어람 대표
최용배(49) 대표는 충무로에서 잔뼈가 굵은 제작자다. 서울대 서양사학과 82학번인 그는 영화 연출의 뜻을 품고 다시 입시 시험을 치르고 서울예술대 영화과에 입학해 연출을 전공했다. 영화과 학생이었을 당시 그의 목표는 "이장호 배창호 감독을 넘어서는 것"이었다고 한다.
졸업 후 정지영 감독의 '남부군' 등 3편의 영화에서 연출부에서 일한 그는 몇 편의 단편영화를 만들고 난 뒤 "감독으로서 목표를 이룰 능력이 안 되면 그런 영화를 제작해야겠다"는 판단에 대우 영화사업부에 입사해 3년간 영화 투자를 맡았다. 이후 강우석 감독이 이끄는 시네마서비스로 옮겨 5년간 투자ㆍ배급 업무를 담당하며 상업영화와 독립영화를 두루 경험했다.
시네마서비스를 나온 그는 2001년 배급 전문 영화사 '청어람'을 창립했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 '품행제로' '죽어도 좋아' '장화, 홍련' '바람난 가족' 등이 그의 손길을 거친 작품들이다. 제작에도 뛰어들어 '효자동 이발사'와''작업의 정석' '흡혈형사 나도열' '괴물' 등을 만들었다. '괴물'의 기록적인 성공 이후 한동안 슬럼프를 겪었는데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강풀 원작의 '26년'과 '괴물2'의 제작이 지연된 것이 큰 요인이었다.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지 26년 뒤 희생자들의 2세들이 펼치는 복수극을 그린 '26년'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소재 때문에 2008년 촬영을 열흘 남짓 앞두고 투자사의 투자 철회로 제작이 무산되는 아픔을 겪었다. 진구 한혜진 임슬옹 등 새롭게 출연진과 스태프를 꾸린 그는 지난달부터 촬영을 시작해 14일까지 총 51회차 중 18회차를 마쳤다.
"순제작비가 46억원인데 아직 다 모이지 않았습니다. 기관 투자자들이 부담스러워해서 주로 개인 투자자들로부터 도움을 받고 있어요. 역사적 가치를 되새기면서도 재미 있는 영화가 될 겁니다. 일부 정치인의 출연 문의도 있었는데 그건 피하려고 해요. 정치적 변수가 있어서 12월 대선 전엔 꼭 개봉할 계획입니다."
고경석기자 kav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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