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나무를 베러 나온 일꾼들에게 이제 나무를 베면 모두 동티를 입으리라 엄포하고는 그 자리에서 비나리를 하고 부적을 나무 밑동에 붙여두었습니다. 아버지는 이튿날 나졸들에게 끌려가서 격노하신 유수 나으리가 지켜보는 가운데 장형 일백 도를 받고 돌아와 시름시름 앓던 중에 장독으로 돌아가셨어요. 어머니도 무업을 잃고 고을에서 쫓겨나게 되었구요.
어머니는 근기에서 우리들에게는 영험이 있다는 파주 감악산에 기도하러 간다며 길가 주막에다 저를 맡겨두고 떠나서는 돌아오지 않았어요. 저는 주막에서 애 보는 업저지 노릇도 하고 부엌 심부름도 하며 밥 얻어먹고 얹혀 있다가 신병이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밥과 국에서 이상한 노린내가 진동하고 반찬마다 벌레가 가득하여 하루에 물 한 그릇 이외에는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었지요. 머릿속이 흔들리고 깨어질 것처럼 아파서 수건으로 동여매지 않고서는 잠시도 서 있거나 앉아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툭하면 물동이를 깨먹고 나르던 밥상도 깻박을 쳐버리니 주막에서는 몹쓸 것이 들어와 장사 망하게 생겼다고 저를 내쫓을 판이었어요. 때마침 장사치가 지나다 저를 보고는 엽전 닷 푼에 사서 홍제원 삼패 색주가에 열 냥 받고 팔아넘겼답니다. 저는 봄가을로 찾아오는 환절기만 되면 시름시름 며칠 앓아눕기는 했어도 홍제원에 간 뒤로는 머리 아픈 것이 거짓말처럼 나아버렸습니다. 무엇보다도 풍악 소리만 나면 절로 온몸에 힘이 나는 것이었지요. 저희 집 주모는 원래 송도 관기였던 이로 가무에 일가를 이룬 예기라고 이름이 자자하던 사람이었는데 제가 온몸에 음률을 지니고 태어난 아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느 시조나 잡가든 한 번 들으면 가사와 곡을 외워버렸고 장구에 해금 가야금도 귀로 듣고 따라 하면 열흘이 못 가서 모두 익혀버렸습니다. 제 기명인 그믐(琴音)이는 주모 춘앵(春鶯)이 지어준 이름입니다만. 저희는 일 년에 수차례나 내왕하는 청국 가는 사행의 역관 군관 상단을 맡아놓고 접대하는 집이어서 저는 한양 성내 중인 아전붙이들에게도 알려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루는 주모 춘앵이 저에게 은근히 이르더군요.
작년에 우리 집에 들러서 연행에 따라갔던 장교가 이번에 호군(護軍)이 되었다는데 너를 들여앉히고 싶다는구나. 네가 내 딸이 된 지 벌써 다섯 해가 되어 가는데 이제 너두 기녀로서는 절정이로구나. 스무 살이 낼 모레라 기예가 아깝지 않으냐? 한양에 들어가 은군자로 풍류남아들을 뒤흔들어볼 때가 되었다구 생각한다.
주모가 말하여 그가 누군지를 생각해보려 애썼지만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구군복을 입은 장교가 부하 군병 두엇과 사인교를 거느리고 왔을 때에야 그의 얼굴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는 김춘영이란 무관으로 이전에 홍제원에서 정사 부사의 행차를 기다리며 우리 집에서 나흘쯤 묵었습니다. 그이는 사행의 호종무관이었는데 군병들에게는 엄했고 국경까지 따라가는 관노들에게는 자애로운 사람이었지요. 언제나 노비들의 저녁밥을 챙겨준 뒤에야 병졸들과 더불어 식사를 들곤 했습니다. 저희 집에서 두 번인가 연회를 열었는데 모두 한양 시전의 상단 사람들이 비용을 댔던 자리였지요. 마지막 날 밤에 상단에서 행하를 내어 제가 그이의 수청을 들게 되었고 그는 뿌리치지 않고 당신 처소에 저를 들였습니다만, 부친의 삼년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저를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랬던 이가 새삼 저를 기억하고 첩실로 들이겠다니 조금은 놀랐습니다. 물론 저는 소싯적부터 홍제원 삼패에 들어가 창기 노릇을 했으므로 여염집 아기씨들처럼 처녀는 아니었지요. 머리얹기는 이미 십육 세에 치루었구요, 그 뒤로도 사행이 있을 때면 서너 차례 수청을 들긴 했습니다. 지금은 얼굴도 기억이 나지 않는 역관이나 상인들이었을 겝니다. 어쨌든 저는 김춘영 호군을 따라 한양 성내로 들어갔습니다. 그가 얻어준 집이 구리개 장악원 근방에 있었는데 방 세 칸에 문간방까지 딸린 아담한 기와집이었어요. 김 호군은 궁의 수문장직으로 야근하는 날이 많았고 본가는 삼청동에 있어서 제 집에는 사나흘에 한 번 들를까 말까 했지요.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