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이 열리는 동안은 신문과 방송이 밝고 맑았는데, 끝나고 나니 다시 칙칙해졌어." 어느 정치 원로가 이렇게 말하며 얼굴을 찌푸렸다. 팔순의 노구에도 잠을 설쳐가며 새벽에 열리는 한국과 일본 축구경기까지 다 봤다는 그는 런던올림픽에서 대한민국 선수들의 모습은 너무 자랑스럽고, 아름다웠다고 했다.
목표를 넘어선 메달 획득, 불가능으로만 생각했던 종목에서의 세계정상 정복만을 놓고 하는 얘기는 아니었다. 그가 우리 선수들에게서 본 것은 이기든 지든 정정당당하게 최선을 다하는 그 자체를 소중히 하는 마음이었다. 박태환과 중국의 쑨양의 서로에 대한 칭찬에서 보듯 유럽의 선수들을 보며 부러워했던 국적과 인종을 떠나 승자는 패자를 위로하고, 패자는 승자를 기꺼이 축하해 주는'아량과 배려'를 우리도 이제는 가지게 됐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그는 4년 전 베이징에서의 패배를 설욕하며 금메달을 딴 유도의 김재범이 결승전에서 다시 만난 맞수인 독일의 비쇼프와 나눈 뜨겁고 긴 포옹이 가장 감명 깊었다고 했다. 그런 마음과 자세야말로 올림픽 정신이고 올림픽이 우리에게 주는 소중한 선물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 정치인들이 제발 좀 이런 자세를 배웠으면 좋겠어."
사실 런던올림픽이라고 모두 아름답고, 당당했던 것은 아니다. 누구보다 공정하고 정확해야 할 심판들의 오심이 선수들의 페어플레이에 찬물을 끼얹었고, 우발적이든 계획적이든 일부 선수들의 경솔한 행동이 정치색을 철저히 배제하는 올림픽 정신에 작은 흠을 내기도 했다. 누구에게나 같아야 할 1초가 너무 길어 펜싱의 신아람은 눈물을 흘려야 했고 여자 배구팀은 일본과의 동메달 결정전 첫 세트에서 잘못된 터치아웃 판정 하나로 역전의 기회를 잃고 무너졌다.
런던올림픽에서 우리 선수들의 메달은 과거와는 분명 그 색깔이 달랐다. 유럽 국가들의 잔치로만 여겨졌던 펜싱과 사격, 체조에서 금메달을 쏟아냈고,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남자축구가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올림픽과 월드컵 개최로 스포츠 강국을 외치던 때와는 또 다른 성취감과 자부심이다. 이를 두고 우리나라도 이제야 진정한 스포츠 선진국이 됐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다. 레슬링과 복싱에서의 투지를 보면 '헝그리 정신'을 팽개친 것도 아니다. 색깔이 달라졌을 뿐이다.
선수들은 메달을 이제 더 이상 물질적 보상의 수단으로만 생각하지 않는다. 그 길에서 세계 최고가 되었다는 자부심과 보람의 상징으로 바뀌었다. 그것을 위해 레슬링의 김현우는"나보다 땀 더 흘린 선수가 있다면 금메달을 가져가라"고 하면서 매트가 수영장이 될 만큼 기꺼이 땀을 흘렸고, 유도의 송대남은 뼈가 부스러지라 매트를 뒹굴었다. 이런 마음가짐과 열정 또한 분명 선진국형 스포츠의 모습이다.
국민들의 수준도 변했다. 올림픽을 위해 부상조차 감추며 긴 시간 남몰래 흘린 땀과 눈물을 소중히 여길 줄 알았다. 승부를 떠나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선수들의 아름다운 열정에 박수를 보냈다. 올 여름 폭염까지 잊게 한 런던올림픽은 이렇게 우리 모두에게 스포츠 선진국으로서의 기쁨과 감동, 깨달음을 주었다.
올림픽이 막을 내리면서 본격적인 대선 경쟁이 시작됐다. 국민들은 이제 정치인들의 멋진 승부를 기대할 것이다. 그러나 원로정치인의 탄식처럼 그들의 모습은 여전히 칙칙하기 그지 없다. 같은 당 경선후보의 있지도 않은 사생활을 폭로하고, 상대 후보에 대해 차마 입에 올릴 수 없는 막말을 해놓고는 구차한 변명만 늘어놓는다. 그렇게 '투명성'을 강조해 놓고는 공천 과정에서 뒷돈이나 받고, 진보세력을 이끌던 책임자는 반칙을 하고도 뻔뻔하게 침묵하고 있다. 당당하게 경기장 나서지 않고 책이나 내면서 뒷전에서 가장 유리한 기회만을 엿보고 있다.
스포츠보다 수준 낮은 후진국형 정치로는 감동을 줄 수 없다. 페어플레이, 상대에 대한 배려와 관용 없는 승리로는 국민의 박수를 받지 못한다. 올림픽 선수보다 못한 정치인이란 소리를 듣지 말아야 한다.
이대현 논설위원 leedh@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