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떼브 쁘레(준비), 알레(시작)!"
지난 8일 서울 용산구 중경고등학교 체육관. 피스트(펜싱 경기 무대) 위에서 마주선 두 선수들의 발이 앞뒤로 빠르게 움직인다. '탁, 타닥, 타다닥.' 공격하는 선수의 칼이 상대 선수의 가슴을 빠르게 파고든다. '땡' 소리와 함께 득점을 알리는 빨간 불이 전광판에 들어온다.
연습경기를 마친 중경고 펜싱 여자 플뢰레 선수 정희원(16ㆍ고 1)양이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건네자, 마스크를 벗고 응하는 상대 선수는 백발이 성성한 중년이다. 치과의사인 이태호(59)씨는 "2000년 시드니올림픽 펜싱 플뢰레에서 김영호 선수가 금메달을 따는 모습을 본 뒤 펜싱 동호인이 됐다"며 "어린 여고생과의 경기에서 져도 기분이 좋다"고 가쁜 숨을 몰아 쉬었다.
1995년 만들어진 서울펜싱클럽(SFC)은 펜싱 불모지나 다름 없던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진 펜싱 동호회. 30여명 남짓 되는 회원들이 매주 2, 3차례 모여 함께 펜싱을 즐긴다. 동호인들은 펜싱 국가대표팀이 런던올림픽에서 최고의 성적을 낸 요즘 어느 때보다 즐겁다. 회사원 이창범(45)씨는 "얼마 전까지만 '펜싱 하는 사람도 다 있네'라며 시큰둥한 반응이었는데, '신아람 1초 오심' 이후로 펜싱 룰을 묻기도 하고 관전평을 해달라고 하는 등 내 주가도 높아졌다"고 웃었다.
동호인들은 이날 귀한 손님을 맞았다. 전날 런던에서 귀국한, 남현희 선수가 속한 국가대표 펜싱 여자 플뢰레팀의 최명진 코치(45)가 연습장을 찾은 것. 최 코치는 신아람 선수가 속해있는 여자 에페팀 심재성 코치와 함께 수해 전부터 펜싱 동호인을 손수 지도하는 등 특별한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최 코치는 "동호인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러 왔다"며 "밤샘 응원을 해 준 시민들이 있어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고 감사의 뜻도 전했다.
동호인들에게 더 큰 선물은 요즘 들어 펜싱을 배우겠다는 사람들이 부쩍 는 것이다. 김경화(38) SFC회장은 "새로 클럽에 가입하겠다고 연락 준 사람이 이번 주에만 4명"이라고 말했다. 이날 처음 동호회를 찾은 김완수(44)씨는 부인 한창영(40)씨와 딸 채윤(11)양과 함께 왔다. 김씨는 "김지연 선수가 펜싱 여자 사브르에서 금메달 따는 모습을 본 딸이 자기도 펜싱 선수가 되겠다며 며칠을 졸라 이 참에 딸과 함께 펜싱을 배워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동호인들이 열정만으로 꾸려나가긴 하지만, 국내 펜싱 환경은 열악하기 그지 없다. 국내에는 아직 피스트를 갖춘 체육시설이 거의 없어 항상 연습에 애를 먹었다. 그나마 중경고에서 허락해줘 지난해부터 겨우 더부살이를 하고 있다. 2,000여명 가량 되는 펜싱 선수들이 처한 현실도 다르지 않다. 비인기 종목인 탓에 어린 선수들이 부상이나 슬럼프에 빠지면 쉽게 사기가 꺾이곤 한다. 중경고 펜싱부 고종환(41) 코치는 "열심히 해도 대학 진학마저 쉽지 않은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3년 경력의 펜싱 사브르 선수였다 10년 넘게 운동을 그만둔 뒤 지난해 4월 동호인으로 다시 칼을 잡았다는 김지훈(32)씨 경험도 비슷하다.
"고교 1학년이던 1997년 우상과도 같았던 코치 선생님이 말 없이 학교를 나오지 않아 찾으러 갔죠. 두부 공장에 취직하셨더라구요. '얼마 전 둘째가 태어났는데, 학교에서 받는 월급으로는 생활이 안 될 것 같아 다른 일을 찾았다'라면서요. 그 뒤로 칼을 놓았죠."
동호인들은 모처럼 만들어진 펜싱 열기가 반짝 관심으로 끝나지 않길 바란다고 입을 모았다. 펜싱의 저변이 확대돼, 선수층이 두터워져야 펜싱 강국으로서의 위상을 지켜갈 수 있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최명진 코치는 "국민들이 잘 한다 잘 한다 하니 선수들도 더 힘을 냈었다"며 "더 많은 이들이 펜싱을 즐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기대했다.
이동현기자 nan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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